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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Nov 06. 2024

나눔과 불림: 서재를 정리하다 생각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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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서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냉장고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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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서는 느슨하다. 삶도 덩달아 느슨하다.  여유라기보단 느슨함이다. 루틴대로 배움대로 살고 있지만 분명, 느슨함이다. 서재에 꽂힌 책들은 최소 한 번은 나를 거쳐갔고 그러니까, 딱히 사는 속도가 읽는 속도보다 빨라서 생긴 느슨함도 아니었다. 새해엔 책장을 뒤집어엎으리라. 마치 삶에서 통제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인 사람처럼 되뇌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서재를 정리하고 나면 어떤 책들은 여전히 소장하고 싶지만, 어떤 책은 처치 곤란이 된다. 어떤 책은 소장하고 싶지만, 영원히 읽지 않을 것을 안다. 냉장고에는 갖가지 사연으로 몫을 다한 책들이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팔아봤자 돈도  푼 되는 것들. 내겐 시체인 책이 누군가에겐 산소호흡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들었다.


나누자. 일단 교실에 몇 권 배치해 보자.


아이들은 시큰둥까지는 아니었지만 딱히 반응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수능을 앞두고 대청소를 해야 하니 금세 치워야하는 애물단지처럼 느끼고 있다. 몇 시간 후, 수업이 끝나고 시간이 좀 남아서 아이들 수다 사이에 끼어있다가 '어? <균쇠> 리커버 나왔네. 예쁘다.'로 시작된 대화. 한 아이가 내게 말했다.


"선생님, 작년 독서캠프 때 나눔 하신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다 읽었는데, 인덱스 붙여놓으신 거 보니 선생님 생각이 읽히는 거 같았어요."


(민망, 반가움, 다시 민망)


"난 요즘 인덱스 붙이기 대신 밑줄 긋고 접기에 미쳐있어. 맘에 드는 책이라도 만난 날엔.."


(키득키득)


"이번에 서재 정리를 제대로 했는데 또 안 읽을 것 같은 책들 중에 애들이 읽을 만한 거 교실에 가져다 뒀어. 나도 가끔 읽고 애들도 읽고 같이 읽자고."


"와, 선생님, 저한테도 나눔 해주세요."


"그래? 좋아!"


어떤 날은 하나의 응답처럼 다가온다. 년에 담임을 맡았던 반의 한 아이가 다가와서 고백하듯 말했다.


"선생님, 작년에 추천해주신 <미움받을 용기> 읽었는데요. 제가 올해 유독 인간관계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그 책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고마워요."


작년엔 교실 속 큐레이팅을 시작하면서 사실 좀 외로웠는데 1년 만에 받은 편지란 이런 느낌인가. '이거 계속해도 될까?' 참 많이도 되물었는데 "네, 계속하세요."라는 답을 들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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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뒤엎는다. 나눌 책과 처분할 책. 여전히 소장하고 싶은 책들을 추리고, 마음이 떠난 줄 알았는데 보내려니 다시 보이는 책들이 눈에 띈다. 후배나 아이들에게 권하기 전에 다시 읽어야 할 책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1. 일에 관한 책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드를 위한 안내서>라든지, <일하는 마음>라든지. 이제는 일이 돈벌이나 적성, 소명 그 무엇도 아닌 듯한 혼란의 시기에 다시 읽는 책들은 무슨 의미일까.


2. 영미 단편선

그때도 좋았고, 지금도 좋은 영미 단편선. 출판사 봄날의 책에서 엮어낸 단편인데, 그때의 난 독자였고 지금은 쓰는데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 독자이므로 글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잘 쓰고 싶다기보단 첫 문장을 달리 시작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독자랄까. 쉽 읽히는 글이 얼마나 잘 쓴 글인지, 그리고 얼마나 쓰기 힘든 글인지 조금이라도 써본 사람은 느낄 것이다. '에세이나 써볼까?'라고 말서는 안 된다.


3. 카뮈의 <이방인>류.

소설 <이방인>은 문장이 정말 좋은데 소설 속 부조리 인간이 너무 부조리해서 이야기가 손에 잘 잡히지 않고 읽고 나서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어쩌면 그게 독자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카뮈의 끝내주는 스킬이겠지만.


".....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  


나는 엄마가 어제 죽었는지 오늘 죽었는지도 모르는 그 서늘한 부조리함이 요즘의 내게서 멀지 않다는 사실을 카뮈의 <이방인>을 고른 아이에게 책을 보낼 결심을 하면서 깨달았다. 내가 '이방인'이 되고 나서 다시 읽은 이 소설은 이제 전혀 부조리하지 않다. 아니 부조리함이 불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카뮈는 독자인 나를 불쾌하게 만드려고 이 글을 쓴 게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쓴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이제 읽는다.



책이 서재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서야 제대로 작동하는 아이러니. 얼마나 나눠질진 모르겠지만 이미 나눔기쁨이 나를 불리고 있다. 오늘의 서재는 최상의 신선도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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