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백수

2019. 10. 28.

by 세필

백수는 광화문 앞에 섰다. 해는 북악산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다. 경복궁을 둘러싼 담장은 노란 불빛으로 빛났다. 백수는 대로변 광화문 현판을 마주 보고 있었다.


뒤에서 사진작가 몇 사람이 본체보다 큰 렌즈를 단 카메라를 들고 이쪽저쪽에서 담벼락을 찍고 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찰칵찰칵 백수의 귀를 찌른다. 백수는 여전히 광화문 앞에 서 있었다.


백수는 백수여서 백수다. 백수는 이미 새벽 여섯 시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곳은 백수가 백수가 아닐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다. 보도블록 세 개 넓이, 이백육십 미리 신발 딱 두 짝 들어갈 공간. 백수는 그곳에 취직했다. 그러기로 했다. 그러고선 벌써 한나절을 그곳에 서 있었다. 밥도 한 끼 먹지도 않고. 그는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힘든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고작 서 있기만 할 뿐인 백수는 그래서 힘들다고 할 수 없었다.


지금껏 백수는 힘들다고 비실댈 때마다 일자리를 잃었다. 세상에 고작 힘들다고 몇 마디 던진 것이 해고 사유가 되는 회사가 어디 있겠냐마는 웬걸, 세상에 절대란 말은 없는 법. 백수는 여태껏 그런 회사만을 전전했다. 그러나 그는 부당해고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백수는 해고될 때마다 중얼거리기만 했다. 내가 멍청해서. 내가 잘못해서. 내가 못난 놈이라서.


마지막으로 찾은 백수의 회사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수가 비좁은 땅에 서 있다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았을 때 광화문은 그를 해고시키겠다 윽박지르지 않았다. 살짝 업무 장소를 벗어나도 조용했다. 해가 중천에 떠서 공기가 더울 때쯤에는 심지어 열린 대문 너머로 바람까지 불어 주었다.


백수는 처음으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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