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쏟아내며 나도 자라 간다
"엄마 이제 며칠 남았어?"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거야. 빨리 화요일이 왔으면 좋겠어. 지금 당장 화요일이면 좋겠다."
아이가 손꼽아 기다리는 화요일은 현장체험학습을 가는 날이다. 노란 버스를 타고 가서 숲 체험을 하고 나무로 자동차를 만든 다는 말에 꽃동이는 열흘도 더 전부터 이 날만을 기다려 왔다. 아이는 현장학습을 앞두고 이토록 설레는데, 아이만큼이나 엄마도 긴장하며 기다린다. 자그마치 '아이 기대에 부응하는' 도시락을 싸야 하기 때문이다.
꽃동이는 현장학습 가서 먹을 거라며 이미 열흘 전부터 간식을 안 먹고 모아 두었다. 할머니가 사주신 멘토스, 아빠가 사준 오레오, 형아가 나눠준 젤리 등 그토록 좋아하는 과자를 먹지 않고 열흘 동안 군침만 흘리며 꾹꾹 참았다. 고작 5년을 살아낸 그 조그만 뱃고래로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저 많은 걸 안 먹고 참는지,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꽃동아, 현장학습 갈 때 도시락 뭐 싸줄까? 선생님이 너네 김밥 잘 안 먹는다고 주먹밥이나 유부 초밥 같은 거 얘기하시던데 뭐 먹고 싶어? 엄마가 귀여운 주먹밥 만들어 줄까?"
김밥은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내심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주먹밥이나 유부 초밥을 기대했지만, 꽃동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아니 아니. 김밥. 한 입에 쏙 들어가는 미니 김밥. 저번에 만들어 줬던 거."
남편과 아이들이 김밥을 좋아해서 종종 싸는데, 둘째가 김밥을 한 입에 넣기 어려워하길래 재료를 반으로 갈라 꼬마 김밥을 싸줬더니 그걸 말하는 것 같았다.
"아, 저번에 만들어줬던 아기 김밥?"
'아기'라는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꽃동이는 다부진 표정으로 대답한다.
"나 아기 아니거든? 나 유치원 다녀. 나 햇살반이야!"
자꾸 아기로 보이는 탓에 무심코 '아기'라는 말을 썼다가 화난 달팽이처럼 무해하고 쓴 표정을 짓는 아이의 말에 얼른 말을 수정한다.
"아 맞다. 꽃동이 유치원 다니고 햇살반이지. 진짜 멋있다. 엄마가 깜박했네. 아기 김밥 말고 어린이 김밥 싸줄게."
아이가 현장학습을 떠나는 전 날부터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첫째와 둘째 모두가 만족하도록 일반 김밥과 어린이 김밥 두 종류를 말려면 손이 더 많이 간다. 뭐니 뭐니 해도 집김밥의 묘미는 다양한 색감에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색깔을 염두에 두고 재료를 택한다. 주황색 당근과 초록색 부추, 노랑 달걀을 넣고 햄, 게맛살, 단무지를 추가한다. 하루 전날엔 당근을 채 썰고, 부추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소금과 참기름으로 무친다. 햄은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게맛살도 미리 비닐을 벗겨 통에 담아둔다.
설레서 콩닥대는 꽃동이의 심장을 토닥이며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고 재운다. 가을 소풍을 떠나는 다섯 살 꼬맹이의 마음은 부푼 풍선처럼 둥실거린다.
동살이 잡히기도 전,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 밥을 안친다. 예전에 엄마가 해줬던 대로, 흰 쌀에 잡곡을 조금 섞어 밥을 짓는다. 미리 채쳐둔 당근에 소금을 한 꼬집 넣어 프라이팬에 살짝 데치고, 햄과 맛살도 노릇노릇하게 익힌다. 마지막으로 달걀 8개를 풀어 도톰한 지단을 만든다.
밥솥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밥을 양푼에 담아 한 김 식히고, 소금과 깨, 참기름을 넣어 살짝 간을 입힌다. 구운 김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밥을 반만 최대한 얇게 펴 바른 뒤 단무지, 게맛살, 햄, 당근과 부추, 달걀지단 순으로 넣고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돌돌 만다.
어린이 김밥은 모든 재료를 얇게 잘라 훨씬 작은 크기로 만든다. 시중에서 파는 꼬마 김밥보다는 크고 일반 김밥보다는 절반 크기 정도이다. 꽃동이 입에 넣으면 한 입에 쏙 들어가면서, 입 안 가득 김밥이 터져 나와 씹는 맛이 느껴지도록 크기를 조절한다. 돌돌 만 김밥 위에 참기름을 기름솔로 솔솔 바르고 물 묻힌 칼로 터지지 않게 살살 자른 뒤, 깨를 톡톡 뿌려 접시에 담으면 완성이다. 깨우지 않았는데도 아침 일찍 일어나 보드게임을 하며 김밥을 기다리던 아이들은 "다 됐다. 아침 먹자!" 소리에 환호하며 식탁으로 모여든다.
집 김밥은 싱거워서 좋다. 심심한 간에 영양만점 재료가 골고루 들어간다. 곰탕 국물에 다진 파와 후추를 살짝 뿌려 곁에 내놓으면 아이들은 후후 불어 가며 엄지 척을 날린다. 엄마 최고라며, 엄마가 만들어준 김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아이들의 신난 목소리에 쌓인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역시 이 맛에 김밥을 싼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도시락을 꾸며야 한다! 비엔나소시지에 칼집을 내 끓는 물에 데치고 김과 치즈, 검은깨로 문어 4 총사를 만든다. 작고 섬세한 작업이라, 그렇지 않아도 눈이 침침한 새벽에 더 눈이 감겨 온다. 하지만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실수하는 순간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옆에서 "좋겠다, 좋겠다"를 연발하는 첫째를 위한 문어도 준비해야 한다.
도시락통에 김밥과 배, 간식을 먹기 좋게 담는다. 아이들과 멀리 까지 나가서 고생하실 선생님을 위한 김밥도 준비한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꼭 선생님과 운전기사님께 드릴 김밥과 간식까지 싸주셨다. 그때는 무겁고 창피했는데 지금 보니 엄마가 새벽부터 얼마나 고생했을까, 얼마나 나를 챙겨주고 싶어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이 가방이 조금 더 무거워져도 나도 꼭 선생님을 위한 것도 챙긴다. 아이가 평생 기억할 소중한 추억을 위해 섬겨주시는 선생님께 감사하다.
첫째와 둘째를 모두 보내고 나면 그제야 한숨 돌린다. 옆구리가 터진 김밥 몇 개를, 지쳐서 입맛이 없는 뱃속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마저 남은 김밥을 싼다. 한 번 말 때 열 줄 정도는 해야 저녁에 남편도 와서 먹고, 다음 날 아침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김밥 계란 전까지 가능하다. 김밥을 말고 설거지와 정리를 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나는 또 남은 김밥 몇 개로 점심을 때운다.
하루가 열흘처럼 길게 느껴지지만 선생님이 '키즈노트'라는 어플로 보내주시는 아이의 활짝 웃는 얼굴에 모든 노력에 보상받는 기분이다. 나도 이렇게 자랐다. 엄마, 아빠의 노력을 먹고 한 뼘 한 뼘 자라났다. 이제 아이들에게 사랑을 물려준다. 그리고 사랑을 쏟아 내며 나는 다시 또 자라 간다.
덧) 현장학습에 다녀온 꽃동이 손에 “엄마”라고 쓴 색종이 편지가 들려있다.
“엄마 재밌어요. 숲체원 또 갈래요. 코코 염소(하트). 엄마 차 타고 갈래요”
오자마자 또 가겠다니! 엄마는 또 도시락을 싸야 할 생각에 아찔하지만, 네가 좋다니 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