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이별, 만남과 헤어짐, 슬럼프와 극복

나 자신을 용서하고 친해지는 일

by 돋을볕

이 또한 지나가리라 (L. W. 스미스)



큰 슬픔이 거센 강물처럼

그대의 삶에 밀려와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

가장 소중한 것들을 영원히 앗아갈 때면

괴로운 마음에 대고 매시간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끝없이 힘든 일이 그대의 감사 노래를 잠재우고

기도하기에도 너무 지칠 때면

이 진실은 당신 마음에서 슬픔을 사라지게 하고

힘든 하루하루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미소 짓고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 차

근심 걱정 없는 날들이 흘러갈 때면

세속의 기쁨에 젖어 안주하지 않도록

이 말을 가장 깊고 가득히 가슴에 담을지어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대의 성실한 노력이 명예와 영광을 가져오고

지상의 모든 귀한 것들이 웃음으로 반길 때면

인생에서 가장 길고 웅장한 이야기도

이 세상에서 스쳐가는 한순간임을 기억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영하 작가는 <단 한 번의 삶>에서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라고 말한다. 이 말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은 어디에 해당하는가? 여전히 확실한 게 거의 없는 걸 보면 난 젊은이인가 보다. 나이가 들수록 정말 확실한 게 많아져서 괴로워지게 될까? 아직 알 수 없지만 '확실함'으로 인해 '괴로워'지는 걸 보면 그것 또한 좋은 것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인간은 평생 확실함과 불확실함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란 말인가.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면 '이것 또한 지나간다'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뇌는 쾌락이든 고통이든 이에 적응하기 마련이고 그에 따른 감정의 강도가 점점 줄어든다고 한다. 로또 당첨자도, 큰 사고를 겪은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비슷한 수준의 행복감으로 맞춰진다. 뇌 과학자들은 고통이나 기쁨은 영구적 상태가 아니라 뇌가 감정의 평형을 맞추는 '과정'중에 오는 일시적 상태라고 본다.


하지만 사실을 '아는 것'과 '겪는 것'은 다르다. 어떤 고통은 평생 갈 것처럼 심연을 침투해 오고, 현재 감정을 과장해서 미래까지 투사시킨다. '이 고통은 이제 시작이다, 이건 나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처이며 극복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미션이다'라는 생각으로 번져가는 것이다.



깊은 슬럼프에 빠져 본 적 있는가? 생살을 떼어내는 듯한 이별을 경험한 적 있는가? 다시 못 볼 헤어짐에 식음을 전폐해 본 적 있는가? 어떤 감정은 "이것 또한 지나간다"라는 말을 비웃는 듯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잊은 듯하다 다시 메어오는 그리움에 하염없이 눈물만 흐를 때, 극복한 듯하다 너무 쉽게 체념하고 포기하는 나를 발견할 때, 예능을 보며 웃다가 문득 그런 내 웃음에서 공허를 발견할 때,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 상상하며 알지 못하는 시간의 틈을 '불안'과 '최악의 상상'으로 채울 때, 이미 지난 일마저 고구마 줄기 캐내듯 억지로 뽑아내 최하의 점수를 매기곤 스스로를 실망의 구렁텅이로 몰아세울 때. 그런 일이 하루이틀이 아니고 몇 달이나 몇 년씩 지속된다면? 그래도 '이 또한 지나갈'일 인 걸까? '스미스'씨를 붙들고 묻고 싶다. 정말 모든 게 다 지나갔냐고. 나중엔 정말 다 희미해지거나 극복하는 게 맞냐고.


wokandapix-person-1821413.jpg


마 전 나는 지독한 이별을 겪었다. 바로 내가 쓴 '작품'과의 생이별이었다. 누군가는 고작 자기가 쓴 글을 가지고 무슨 이별이냐고 가볍게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마다 경중을 두는 일이 다르고, 마음을 쏟는 일이 다르므로 그건 뭘 모르는 소리다. 사람과의 이별만큼 내가 창조해 낸 '세계'와의 이별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작별인사를 건넨 것도, 그렇다고 재회를 결심한 것도 아니니 이 이별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일 년간, 브런치 연재를 쉬고 장편 소설 창작에 몰두했다. 배운 적도 없는 긴 호흡의 글을 써 내려가며 매일 한계에 부딪히고 안갯속을 헤맸다.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이 살아나 내 삶을 덮치고 뇌리를 장악했다. 그들은 어딜 가든 나와 함께였으며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그들의 입장에서 보고 느끼게 했다. 나는 스무 살의 여자였다가 예순의 남자가 됐다. 그들은 끊임없이 내 영혼을 훑고 지나가며 자기의 삶을 들여다봐달라고, 자기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 달라고 보챘다.


이야기에 종지부가 찍어진 뒤에도, 그들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어디선가 살아 숨 쉬며 자신이 왜 그때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는 어떻게 변화할지를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때론 그때 과거의 이야기를 뒤엎고 오류를 정정하기도 했다.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깊이 사랑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야기에 깊이 빠져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내 말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 이상으로 정신적인 삶을 장악해 오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내 작품은 <공모전>이라는 거대한 모험을 떠났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몇 백 명, 혹은 몇 천편의 이야기들이 모인 자리에서 단 한 편의 작품만 책 출간으로 살아남았다. 작품 한 편을 완성해 냈다는 것만으로도 자축하자고, 공모전 기한에 맞춰 냈던 성실함에 축배를 들자고 자위하면서도 한 편에선 왜 내 작품은 안 됐을까? 이 작품에 희망이 있을까? 과연 그 많은 응모작들을 다 읽기는 했을까? AI가 소설도 쓰는 마당에 이 직업에 희망이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완성된 글을 신뢰할 수 있는 몇 사람에게 읽어달라 청했다. 그분들의 후기는 부러진 펜의 깃대를 다시 세울 수 있는 힘을 주었지만, 이내 어두움이 다시 중심을 장악했다. 주위에서 아무리 재밌었다고, 좋은 글이라고 칭찬해 줘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다. 내 안에서 그 소리들을 '진짜'로 믿지 못했다. '어차피 떨어진 글'이라는 생각에 잠식되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모전에서 떨어지지고 난 뒤, 퇴고를 거듭할수록 글이 잘려 나갔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쉼표 하나, 인물 하나하나가 다 진부해 보였다. 김연수 작가가 <소설가의 일>에서 썼듯, 음식물 쓰레기 통에 손을 집어 넣고 휘휘 저어 쓸만한 게 있을까 건져내 보는 고문 같은 시간이었다. 사실 '글'자체가 '꼴 보기' 싫었다.


ds_30-concepts-4916635.jpg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과 눈만 감아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뒤로하고, 시간은 끊임없이 몰려왔다. 아침이 오고, 식사 시간이 되고, 찬 바람이 물러간 자리에 꽃망울이 돋아났다. 그에 맞춰 나도 억지로 목구멍에 밥을 밀어 넣고, 운동을 하고 몸을 씻었다. 어떠한 책도 읽을 수 없었고 '글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매일 '운동'을 하러 나갔다. 나처럼 정신노동을 많이 하는 사람에겐 꾸준히 몸을 움직이고, 정해진 루틴을 지켜서 사는 게 큰 도움이 된다. 마음에 절망이 국그릇 엎어지듯 쏟아져 나올 땐 시를 읽고 따라 썼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내 분야와 무관한 글을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되었다.


roseday1231-cornus-officinalis-4866442.jpg

그러다 보니 '시'가 나왔다. 깊고 응축된 목소리가 얼음 덩어리처럼 단단하게 뭉쳐져 흘러내렸다. 길가에 돋아난 산수유의 꽃망울을 보다가, 헬스장에 가서 몸을 움직이다가, 빈 샴푸통의 바닥을 치다가도 핸드폰을 들어 마음을 기록해 나갔다. 그리고 그 글이 점차 번져나가 다시 브런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시간은 본질적인 질문에 가닿는 비밀통로 같다. 잘 벼려진 칼날 위에 올라선 무당처럼 온 정신을 집중하고 나를 지으신 이의 부름에 집중한다. 꼭 소설이어야 하는가? 꼭 전공서적을 많이 읽어야 하는가? 왜 공모전에 당선돼야 하는가? 돌이켜보면 공모전을 위해 쓴 글도 아니었고, 어떠한 목적을 가진 글도 아니었다. 그저 쓰다 보니 소설이 되었고 장편이 되었다. 그저 듣다 보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고 온 존재로 응답해야 했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주길 기다린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봐주길 원한다. 그게 소설이든, 동화든, 시든, 에세이든 그 어떤 종류의 글이든 기록해 주길 원한다.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 박사는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인류는 코스모스에서 태어났으며 인류의 장차 운명도 코스모스와 깊게 관련돼 있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 있었던 대사건들뿐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까지도 따지고 보면 하나같이 우리를 둘러싼 우주의 기원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라고 말한다. 우주를 아는 일은 인류에 대해 아는 일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나'를 알아가는 일 또한 우주를 아는 일이요, 그 내면을 서술하는 일은 우주를 기록하는 일과 같다. 한 명의 인간을 넘어서 '우리'를 이해하고 더 거대한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 좋아지는 건진 모르겠으나 과거가 '전승'된다. 우리는 '나'를 넘어서 어떤 깊은 본질에 가닿는 연결된 존재이길 갈망한다. 타인을 보며 나를 발견하고, 나를 넘어서 공감과 응원을 받는 공통의 인류이길 원한다.


미국의 사회 운동가 파커 J. 파머는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에서 중요한 사실을 반복해서 서술한다. '길이 닫힐 때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 문 하나가 닫히면 반드시 다른 문이 열리거나 더 많은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젠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는 마음이 든다.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보이는 것을 넘어서 본질에 가닿는 삶을 기록하고, 나를 통과하는 누군가의 부름에 온존재로 응답하고 싶다. 내가 글을 쓰지 않는 순간조차 글을 쓰는 과정이었고, 홀로 좌절하는 시간조차 누군가에게 더 깊이 가닿을 수 있는 익어가는 시간이었다. 이별도 만남도, 헤어짐도 슬럼프도 어찌 보면 인생의 사계절처럼 끊임없이 다시 찾아오는 성실과 화평의 언어로 보인다. 그리고 그 '성실'과 '화평'은 앗아가는 것보다 내손에 새롭게 쥐어주는 게 더 많다. 오늘도 할 수 있는 걸 하고, 먹을 수 있는 걸 먹고, 주어진 자유만큼 몸을 움직인다.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볼 수 있는 책을 읽고, 감사한 일들을 찾아낸다. 살아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으며, 그게 누구든 무엇이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넘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절벽 끝에서 발견한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