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끝에서 발견한 길

괌 <사랑의 절벽> 속 전설을 소설로 만든다면

by 돋을볕

기원전 2000년경 차모로인(Chamorro)이 섬에 정착해 자체적인 사회. 문화를 형성했다. 이후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시작으로 미국과 일본을 거쳐 다시 미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태교나 가족 여행지로 유명한 '괌'의 역사다. 많은 나라의 식민 통치 영향에도 워낙 휴양지로 인기 있는 곳이다 보니 원주민들의 문화가 담긴 상품이나 장소가 여행지로 많이 개발되어 있다.


그중에 '사랑의 절벽(Two Lovers Point)'이라는 곳이 있다. 괌 북부에 있는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로 높이 약 120미터 절벽에서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다. 연인의 사랑에 대한 전설 때문에 우리나라의 서울타워처럼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연인들의 자물쇠가 가득 달려 있다.


얼마 전 이곳에 다녀왔다. 사랑을 맹세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괌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비행기 시간이 여유로워 차를 렌트해 근처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괌은 어딜 가나 산호빛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기에 절벽 위에서 보는 바다가 그리 인상적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관광지보다는 현지인들의 문화에 더 관심이 많고 번화한 곳보다는 한적한 곳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행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맛있는 커피 한 잔 같은 것! 이 장소가 괌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되었다.


아무것도 있을 것 같지 않은 2차선의 황량한 도로를 차를 타고 한참 달리다 보니 끝에 절벽이 있었다. 그 절벽에 붙은 전설은 이러하다. 스페인 통치 시기에, 한 차모로 여성이 스페인 귀족(혹은 장교)과 강제 결혼을 해야 했다. 이 여성에겐 사랑하는 차모로 남성이 있었고 둘은 강제 결혼을 피해 도망쳤다. 그리고 이 절벽에서 서로의 머리를 묶고 함께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이렇게 비극적인 장소가 사랑을 확인하고 맹세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결국 둘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죽음으로 그 사랑이 끝났다. 식민 시대에 어디 그런 사람이 한둘이었겠나? 이런 비관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처음엔 별 감흥이 없었다. 다만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매력적인 바다가 서슬 퍼런 뱀의 송곳니처럼 매몰차보였다. 사진 스팟이 절벽 끝 난간에 위치해 있었는데 바람이 쌩쌩 부는 난간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툭 치기만 해도 그 낮은 난간 바깥으로 그대로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물론, 누구와 사랑의 맹세도 없이 혼자서 말이다. 왜 이런 곳이 유명 관광지가 되었고, 이 절벽에서 사진 하나 찍는 걸로 입장료를 받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 나를 가장 괴롭히는 분야이다. 이해가 가지 않으면 생각이 도대체 멈추질 않고 그 상황, 그 장소로 머리가 수없이 복기하며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복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상상력이란 게 따라붙기 마련이고 마침내 그 당사자가 되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끌려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 원주민 여성이 되어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 전설에 나오는 연인의 이름은 알려진 바 없지만, 차모로식의 전통 이름을 빌려 자연과 정체성 중심의 이름으로 붙여보았다.




**아래 이야기는 <사랑의 절벽>에 써있는 짤막한 설명을 바탕으로 제가 순수하게 창작해낸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타시와 타가 - 사랑의 절벽>



'타시(Tasi=차모로어로 '바다'라는 뜻)'는 부모님이 일을 나가신 뒤, 여섯 동생을 돌보며 집에 있었다. 부모님이 오시기 전에 식사 준비를 해놓으려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길이 없어 보이는 야생 정글에도 '타시'만 아는 지름길과 오솔길이 즐비했다. 타시는 숲길을 달려 그녀의 연인 '타가'(Taga=차모로어로 '전사'라는 뜻)에게 갔다. 타가는 타시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달걀 두 개와 코코넛 열매를 건넸다. 타시는 수줍게 타가의 볼에 입 맞추고 다시 집으로 갔다. 집에는 여섯 동생과 모르는 남성 두 명이 함께였다. 스페인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런 깊은 산속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타시는 그들에게도 저녁을 대접했다.


부모님이 집에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는 그들의 모습을 봤다. 부모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온몸을 벌벌 떨었다. 함께 저녁을 먹던 남성 두 명 중 신분이 더 낮아 보이는 사람이 일어나 부모님께 다가가 무어라 말을 했다. 부모님의 얼굴이 점점 더 사색이 됐다. 그 이유를 타시도 곧 알게 되었다.


내일 아침, 두 남자가 산을 내려갈 때 타시도 따라 내려가야 한다. 만약 타시가 가지 않는다면 그녀의 동생 중 한 명이 가야 한다. 타시는 잠이 오지 않았다. 눈앞에 타가의 얼굴이 떠오르고 눈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린 동생들을 대신해 내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말도 통하지 않는 데다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저 남자를 따라가는 게 맞는 걸까? 그녀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을 때 밖에서 닭이 울었다. 타시는 옆으로 돌아누워 울었다. 또다시 닭이 울었다. 닭이 울기에는 사위가 너무 어두웠다. 혹시...?


타시는 조용히 일어나 집 밖으로 나섰다. 타가였다. 타가도 많이 울었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둘은 서로를 껴안은 채 소리 죽여 울었다.


-떠나자.

-어디로?

-어디든.

-금방 잡힐 거야.

-이대로 널 보낼 순 없어.

-내가 안 가면 내 동생이 가야 해.

-그래도 널 보낼 순 없어. 네가 간다면 나도 따라갈 거야.

-그건 안 돼. 널 죽일 거야.

-상관없어. 네가 없으면 어차피 난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둘은 손을 맞잡고 발을 옮겼다. 사각사각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소리는 점점 더 빨라졌다. 나뭇잎 밟히는 소리에서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로, 바위를 뛰어넘는 소리로, 어딘가에 긁히고 부딪히는 소리로 변해갔다. 둘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그들만의 오솔길을 따라 정글을 파고들었다. 섬을 막아선 바다를 사방에 끼고 둘은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섬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주 작은 섬. 사방을 둘러싼 스페인 군대. 더 이상 자신들을 보호해 줄 통치자도 부모도 없었다.


강자의 눈치를 보고, 약자를 고발한다. 먼저 밀고하지 않으면 밀고당한다. 식민지라는 건 그런 거였다. 타시와 타가가 갈 수 있는 안전한 곳은 없었다. 도망쳐서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도 없었다. 둘은 그저 손을 맞잡고 달렸다. 숨이 차서 옆구리가 아파오도록,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 사방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않게 달렸다.


그렇게 달려간 곳은 바다였다. 바다를 향해 절규하듯 깎아지른 벼랑이었다. 멀리서 스페인 군인들과 여러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쫓아오는 소리가 났다. 타시와 타가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타가, 넌 돌아가.

-어디로 가란 말이야?

-집으로 돌아가. 여기 있으면 죽을 거야.

-너만 두고 갈 순 없어. 우리 석양이 잘 보이는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잖아. 거기가 내 집이고, 우리 집이야.

-더 이상 우리 집은 없어. 내 집도 없을 거야.

-타시, 잘 들어. 우린 이미 도망자가 됐어. 우리가 이대로 헤어지더라도 너를 데리고 도망친 나는 숨을 곳이 없어. 그리고 난 그렇게 숨지도 않을 거야. 너를 숨게 만들지 않을 거야. 너는 언제나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넌 숨지 않아도 돼. 내가 책임질게.

-뭘 어떻게 책임진단 거야? 타가. 이건 숨는 게 아니야. 네가 날 지키고 싶듯, 나도 널 지키고 싶어. 제발 돌아가.


두 사람이 언쟁을 하는 사이 날이 밝았다. 검푸른 바다가 거대한 입을 벌리고 절벽을 향해 넘실거리고 있었다.

-거기 두 사람! 당장 멈춰!


타시와 타가는 맞잡은 손을 놓았다. 땀으로 범벅된 손아귀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타가는 높이 올려 묶은 머리를 풀었다. 타시는 길게 땋은 머리끝을 타가의 푼 머리끝에 묶었다. 타가가 한번 더 힘주어 머리가 풀리지 않도록 세게 돌려 묶었다.


물에 닿은 머리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깍지 낀 손을 놓쳐도, 파도가 두 사람 품을 갈라놓아도 칭칭 동여맨 머리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타시는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해주셨던 이야기를 기억했다.


"머리를 묶는다는 건 영혼을 묶는 것과 같단다. 너의 가장 높은 곳, 가장 깊은 곳에서 자라난 너의 생명이 다른 이의 생명과 맞닿는 거야. 그러니 머리카락을 소중히 간직하거라."


-바다와 바람과 산의 이름을 빌려서 맹세합니다.

-타시와 타가는 영원히 함께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영원히 하나가 되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헤엄치고, 드넓은 하늘을 가로지르며 아무도 갈라놓을 수 없는 곳에 영원한 새로운 길이 펼쳐졌다.




**위 이야기 속 인물의 이름이나 상황, 이야기는 <사랑의 절벽>에 전해 내려오는 “원주민 남녀가 함께 뛰어내려 사랑을 맹세한 장소”란 안내 문구를 바탕으로 모두 제가 지어낸 소설입니다. 소설이기에 사실과 다름을 밝힙니다.








살다 보면, 최선을 다해 달려왔지만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고, 그렇다고 혼자 헤쳐나갈 힘도 없다. 허무와 공포, 두려움이 엄습할 때 절벽을 마주한 기분이다. 벼랑 끝에 매달려 아무런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럴 때, 이 절벽의 전설이 다시 떠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높은 절벽 끝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누구나 가지 못하는 그곳에 새로운 발자취를 남겼다. 목숨을 던지라는 말이 아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라는 말이 아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시선을 내려 바다를 보자. 길은 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길이 나를 향해 활짝 품을 내밀며 걸어오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CCTV 확인 결과,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