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 기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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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8시에 만나는 여행 일정 때문에 일찍 일어났다. 생전 마시지 않던 어제의 칵테일 알코올 기운 때문인지 맞지 않는 베개 때문인지 머리가 무겁고 개운하지 않았다.
날이 잔뜩 흐렸다. 오늘은 해발 1400미터가 넘는 바나힐을 가는 날이다.
‘날씨가 흐리네. 이러다 바나힐 올라가면 비가 와서 풍경 못 보는 거 아냐?’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날씨라 걱정이 되었다.
7시도 안 되어 조식을 먹고 일찍 내려가 엄마와 거리 풍경을 보았다. 아침 출근하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도로를 보고 또 여행 중 관광버스를 타면서 느낀 거지만 이곳에서의 오토바이와 자동차는 우리처럼 과속하지 않는다. 어쩌면 수많은 오토바이와 도로를 공유해야 하는 베트남이기 때문에 과속이 큰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서로 과속을 하지 않는 불문율 같은 규칙이 생긴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비 오는 거리를 펄럭이는 비닐우비 입고 달리는 라이더들은 모두 헬멧을 꼭 착용하고 있었다.
바나힐을 향해 달려가는 버스 밖으로 검은 구름은 가득했고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다. 결국 도착한 바나힐은 저 멀리 안개와 구름 속에 숨겨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내내 안개 속이었다. 바깥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다.
바나힐에 도착했다. 안개 사이로 프랑스인들이 휴양지로 쓰기 위해 지었다는 성의 뾰족한 지붕들이 언듯언듯 보였다. 비도 오고 안개도 자욱하고 바람도 불어 춥기까지 했다. 결국 실내 놀이공원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유 시간 동안 엄마와 놀이공원 내부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다시 야외로 나왔을 때 다행히 잠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희미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쯤이었을까. 갑자기 느낌이 이상했다. 급히 화장실에 갔다. 헉, 생리라니!
‘이게 뭐야? 생리는 일주일 전에 끝났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나름 규칙적이던 주기가 흐트러진 이유를 찾는 것은 둘째치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나는 얼른 번역어플을 켰다. 그리고 가까운 선물매장의 여자직원을 급히 찾아 번역된 문장을 보여주었다.
‘혹시 생리대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뜻밖의 질문에 직원은 옆에 있는 직원과 몇 마디 하더니
“디스 웨이 엘리베이터, 비 원, 비 원”
지하 2층에 있던 나에게 지하 1층으로 가란 이야기였다. 다시 지하 1층에 올라가 선물매장을 찾은 나는 똑같이 질문했다.
“노노.”
결국 구할 곳이 없다는 말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문득 함께 온 여자 가이드가 생각났다. 우리가 바나힐을 돌아보는 동안 패스트푸드점에 있을 거라고 이야기한 것도 떠올랐다. 나는 얼른 그곳을 급히 찾아갔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번역 문구를 보여주었다. 가이드는 놀란 얼굴을 하더니 손으로 자기 가방을 가리켰다. 마침 생리대가 있었던 거다!
“땡큐! 땡큐!”
나는 손을 모으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날의 해프닝은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주기가 일정한 편이었고 그때가 가까워지면 머리가 아프고 잘 체하는 전조 증상이 있다. 생각해 보니 오늘 속이 안 좋고 아침부터 머리가 개운하지 못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어쨌든 여자 가이드의 도움으로 급한 순간은 넘길 수 있었다.
한숨 돌린 나는 아까보다 맑아진 바나힐 야외를 엄마와 여유 있게 돌아보았다. 중세시대 성 같은 건물들이 겹겹이 있는 풍경은 정말 이국적이었다. 어느 오래된 유럽 도시를 돌아다니는 듯한 이색적인 골목에서 엄마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멋진 성이 아닌 길가의 꽃들이었다.
“아유, 곱다.”
“이거 집에서 키우는 데 여기는 겹꽃이네.”
“소복하게 잘도 자랐네. 더운 곳이어서 그런지 더 큰 것 같다.”
연신 집에 키우시는 화초들을 생각하시며 말씀하셨다. 바다 사진만 찍으셨던 엄마가 처음으로 휴대폰 카메라를 가까이 한 건 꽃들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엄마한테 필요한 건 대단한 관광지가 아닐지 모른다. 그저 좋아하는 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신 것일 수도 있다. 그걸 알기에 꽃을 보실 때는 그저 옆에서 있었고 여기 온 김에 이곳저곳 다 돌아다니자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엄마가 좋아하는 풍경을 즐기시는 시간을 드린 게 좋았다.
잠시 파란 하늘을 보여주었던 바나힐 꼭대기는 이내 다시 흐려져 안갯속에 가려졌다. 우리는 다시 그 속을 헤치며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아래는 아직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다. 날씨가 좋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았다.
이후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나는 생리대 살 기회만 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에 갔을 때 나는 여자 가이드에게 번역기로 다시 물었다.
‘근처에 생리대 살 수 있는 곳이 있어요?’
여자 가이드는 식당 여주인에게 뭔가를 묻더니 나를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잠시 걸어가니 우리나라 편의점 같은 곳이 보였다. 그리고는 가이드는 물건이 있는 곳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여러 종류를 보며 고민하는 나를 보고 한 제품을 가리키며 서툰 한국말로 말했다.
“이거 좋아요.”
이렇게 나는 베트남에서 생리대를 구입했다. 참 어이없으면서도 실소가 나오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왜 이 가이드가 이걸 추천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몸으로 느꼈다. 와! 이 쿨감이라니! 나중에 딸에게 말하니 이 쿨한 생리대가 유명해서 베트남에 놀러 간 딸아이 친구들도 기념으로 사 오는 물건이라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 해프닝 속에 새로운 경험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다음 6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