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론 Apr 01. 2024

덕후의 길

 

어려서부터 연필을 좋아했다. 글씨를 쓸 때 적당한 마찰력으로 천천히 손을 따라오는 느낌이 좋다. 사각거리는 매력적인 소리도 좋았다. 미끈거리는 볼펜은 지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 손의 힘으로 움직이는, 통제할 여유를 주는 연필이 좋았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사용했던 재료도 집에 굴러다녔던 연필이었다. 가장 구하기 쉽고 단순한 연필로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즈음 오로지 4B연필만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다. 연필을 움직이다 보면 눈이 그려지고 입술이 그려지고 얼굴이 완성되는 모습이 신기했다. 슥슥 들리는 연필소리는 마치 집중을 도와주는 음악처럼 몰입의 순간으로 빠져 들게 했다.


무언가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자꾸 눈에 보인다. 임신을 하게 되면 임산부가 많이 보이고 아이 엄마가 되면 아이들이 눈에 잘 들어오는 것처럼. 연필에 흔한 HB나 4B연필 이외에 수많은 종류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늘과 실처럼 연필에는 지우개가 따라온다. 그저 틀린 글자를 고치기 위해 쓰는 문방구 지우개만 알던 내가 미술용 지우개부터 연필처럼 조금씩 나오는 지우개, 전동 지우개 등 다양하게 알게 되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떡지우개라고 부르는 니더블 지우개였다. 퍼티지우개라고도 부르는자연스러운 명암을 조절할 때 참 유용했다. 연필로 자연스러운 명암을 만들 수도 있지만 떡지우개만의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그라데이션 효과를 줄 수 있었다.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떡처럼 주물러 모양을 만들 수 있다. 일반 지우개처럼 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어서 굉장히 오랫동안 쓸 수 있는 특이한 지우개였다.

 

사람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다. 무언가 준비가 되면 연결된 또 다른 무언가에 욕심이 생긴다. 옷을 사면 어울리는 구두를 사고 싶고 분위기에 맞는 가방을 사고 싶어지게 된다. 나에게 수채화물감이 그랬고 유성색연필이 그랬다.


초등학생 막내의 18색 물감을 쓰다가 제대로 된 나만의 수채화물감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어느 주말, 큰맘 먹고 큰 화방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어찌나 설레던지. 물감 코너에 가서 이것저것을 비교하며 고르는 그 시간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사기 위해 고르는 그 순간의 기분은 느껴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새로운 도구를 마련할 때마다 표현도 다양해졌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해 보았다. 어설픈 그림이나마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다양한 도구로 다양한 표현을 하는 자유로운 그 순간만큼은 유명한 화가 못지않게 나도 작가였다. 무엇보다 그 작은 도구들을 하나하나 마련하면서 느끼는 충만함은 어느 명품을 소유하는 것 못지않았다.


무언가 깊이 빠진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느낌은 누구나 느낄 것이다. 물건을 소유하는 것만을 위한 것이 아닌 그 과정으로 즐거움을 느낀다.  기쁨으로 가득해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들이다.  처음의 작은 관심이 이어져 깊은 이해로 연결되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이 자발적인 지식은 학창 시절의 공부와 달리 재미가 있다.


한 분야에 열중한 사람을 일컫는 ‘덕후’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물이나 취미에 심취한 사람을 말한다. 예전이라면 사람들과의 만남을 뒤로 한 채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상상하여 부정적인 인상이었겠지만 지금은 좀 다른 것 같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분야라고 그 분야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의 열정과 지식은 관련 직업인들보다 더 뛰어난 경우도 많다.


한 방송사에서 ‘덕후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이런 덕후들의 생활을 인터뷰하여 방영한 적이 있었다. 취미를 넘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 일어서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취미가 내공이 쌓여 또 다른 직업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누구에게는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그들만의 열정과 가치가 버무려져 멋진 하나의 분야를 만들었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게 되면 가장 행복하다. 그 모습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바로 ‘덕후’인 것이다.


나는 그에 못 미치지만 그들의 마음은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의욕적인 관심과 연구, 나름의 나아가려는 노력이 마냥 즐거운 사람들인 것이다. 삶을 즐기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과정을 즐기는 사람, 바로 덕후다.


‘덕후’ 정도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즐기는 방법을 갖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것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면 당신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칼국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