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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May 05. 2024

우울한 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몇 주 동안 내내 바빴다. 몸도 마음도. 퇴근시간을 지키기는커녕 1시간 반이 넘어 집에 가기도 하고 개인 시간에도 생각들이 멈추지 않았다. 나로 인한 일들은 아니었지만 책임 있는 자리에서 내 몫이라 생각했다.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신중한 처리를 위해 고민을 많이 해야 했다. 이 와중에 개인적인 감정도 엉망이 된 일도 생겼다.

나흘 연휴의 계획도 없었다. 그저 집, 그리고 공부하기 바쁜 막내딸 챙기기가 대부분이었다. 내 기분이 나아지기 전에 휴일이라고 억지스러운 상황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연휴 첫날, 일정이 있는 막내를 데려다주고 나도 산책을 했다. 장도 보고 냉장고 정리도 했다. 저녁이 되어 식탁에 멍하니 앉아 이것저것 영상을 보다가 한 광고물이 눈에 띄었다.

AI를 이용한 영어회화 광고였다. 나도 모르게 사이트에 들어가 둘러보았다. 그리고 신청했다. 즉흥적일 수 있지만 마음속 내 욕구를 다시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문과생이었다. 책을 좋아했고 영어를 좋아했다. 그 시절 외부의 도움 없이 영어공부하면서 언어의 힘과 재미를 느꼈다. 연수중 원어민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고 어울리기도 했다. 영어로 꿈을 꾸기까지 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영어를 쓰지 않은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항상 마음속에선 영어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외국에서 번역기를 이용하면서도 내가 직접 자유롭게 대화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웠지만 다시 일상으로 들어오면 그뿐이었다. 내 공부보다 더 급한 일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런데 우울함이 반복되던 어제, 갑자기 온 기회였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한 것이다. 결제 완료 후 2시간 동안 내내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영어로 말했다. 사실 말했다가 보다 어버버거리는 것이 훨씬 많았다. 문법은커녕 머릿속이 텅 빈 걸 절감했다. 그렇게 많이 알던 단어들도 이제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답답하니 음음만 반복했다.

AI튜터는 강력하다. 내 맞춤형으로 대화를 이어주기도 하고 가장 훌륭한 점은 충분히 기다릴 줄 알고 부정적 감정을 보이지 않으면서 수정해 주는 것이다.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입장일 수 있다. 그저 기계적인 침묵일 뿐일 테지만 그게 좋았다. AI는 시간이 필요 없기도 자유롭기도 하다.

습관을 만들기 가장 좋은 때는 내가 힘들 때이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감정에서 벗어나고 나의 효능감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좋은 습관을 위해 나를 움직인다는 긍정성이 도파민을 불러와 기분을 나아지게 한다. 그리고 힘든 상황에서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집중하기 좋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힘들 때 하는 행동들이 있었다. 정신없이 책을 읽거나 필사를 한 적도 있었고 감정적으로 힘든 시절에는 작은 그림들을 꾸준히 그렸다. 복잡한 마음을 덜어내기 위해 무작정 걷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나에게 습관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나에게 있는 좋은 습관들은 지금도 나를 지키고 있지만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한 행동들이 파수꾼처럼 나를 단단히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이제 이틀밖에 안 된 영어회화를 하면서 학창 시절 즐겁게 공부했던 생각들이 새록새록 난다. 사실 어떻게 공부했다는 행위보다 영어를 하면서 기분 좋았던 성취감이나 자신감이 떠오른다. 현재와 다르겠지만 영어를 대하는 긍정적인 나의 태도는 아마 공부를 지속하기에 충분할 듯하다.

얼마나 갈 진 모르겠다. 하지만 우울한 나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면 충분하다. 그리고 작심삼일을 삼일마다 하면 되니까. 멋진 회화솜씨도 기대하고 싶지만 멍하니 의미 없는 영상만 보는 것보다 나를 사랑하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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