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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nja Apr 12. 2018

헬싱키 회사원의 겨울 옷걸이

일 년의 절반 이상을 패딩과 코트로 살아 보아요

4월이 왔다. 시간 참 빠르다. 

그렇게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봄님이 이제는 오시려나.

퇴근하고 즐거웁게 외식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찍은 석양. 해...햇님이 저녁까지...(오열)


점점 낮이 길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나의 옷은 코트와 두터운 재킷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 년의 절반이 넘는 겨울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 끝을 믿지 못하겠다. 


동무 한번만 더 눈을 내린다면.. 가만안두갔어


이곳에 와서 주구장창 눈으로 덮힌 하얀 들판을 거닐다 보면 한국인들의 온도차 나는 다이내믹한 기질은 여러 계절을 가진 기후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계절이 몇 달 사이로 주기적으로 변하고 날씨도 변하니 환경 전체가 환기되는 무언가가 분명 있다. 이곳 사람들이 비교적 차분하고 감정표현이 덜한 것을 보면 오랜 겨울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반년을 넘는 시간 동안 겨울을 겪다 보니 두꺼운 외투가 지겹고 무거워 괜히 더 피곤하고 처지는 날이 종종 있다. 아휴, 겨울 참 지겹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왜 유럽인들이 햇빛만 보면 환장하듯 뛰쳐나가 태닝을 하는지 뼛속 깊이 느낀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스스로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만 해도, 점점 짧아지는 것 같은 봄과 가을에 한숨을 쉬면서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한국은 없고 사계절이 뚜렷했던 조선만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은 참 트루로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다. 이곳의 겨울은 10월 말쯤 시작해서 4월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일 년 내 사계절이 각각 차지하는 지분이 많이 다르다.

최대 주주: 겨울


이곳에 와서 어두운 겨울이 계속되다 보니 두껍고 무거운 재킷을 계속, 정말 계속 입는 게 지겨워진다. 바로 지금이 그쯤이다. 


겉옷은 옷걸이에 걸어요.


무거운 겨울옷을 오래 입어서일까, 이곳에서는 웃옷을 걸 수 있는 옷걸이가 어디에나 있다. 카페를 가도, 도서관을 가도, 학교를 가도, 식당을 가도, 그 어느 장소를 가도 옷걸이가 필수다. 어떤 때에는 옷걸이가 이미 만석(?)이라 옷을 걸기 힘들 때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재킷에는 옷을 걸 수 있는 옷걸이용 고리가 있다.


한국에서 가져온 옷들 중에는 옷걸이용 걸이가 없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내 옷을 걸어주겠다고 하고 내 옷을 가져간 친구가 난감하게 옷을 걸지 못하고 얹혀주는 경우를 몇 번 봤다. 우리는 외투를 잘 걸지 않는다. 다만 의자 안으로 넣을 뿐. 




학교나 도서관 같은 경우에는 입구에 엄청난 옷걸이들이 있는데, 이곳에 옷을 걸어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교내를 활보하는 친구들도 많다.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서라기 보다는 그냥 어렸을 때부터 해오던 습관이랄까. 이전에 통역을 할 일이 있어 헬싱키 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가본 적이 있는데 아침에 아이들이 등교하면 모두 다 옷을 벗어 옷걸이에 차례대로 걸고 신발도 벗어 놓는 것을 보았다. 


핀란드 초등학교 입구의 흔한 풍경. (출처:Yle, https://yle.fi/uutiset/3-8494270)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이곳의 친구들 중에서도 자신의 물건을 반드시 물아일체처럼 몸에 지니고 다녀야만 하는 친구들이 있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잠깐 내려갈 때도 모든 물건을 가방에 챙기고 재킷도 챙겨 입고 내려가서 커피를 마시는 친구도 봤다. 회사에서도 굳이 늘 자기 가방을 메고 다니는 동료가 한 명 있는데, 가끔은 그 친구가 화장실을 갈 때 가방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내가 그 가방을 지켜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공연장이나 박물관과 같은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모이는 장소에 가면 옷을 맡기고 번호표를 받는 경우도 있는데 종종 수고비를 받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큰 박물관이나 극장에서는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여러 번 보긴 했지만 이곳에서는 더욱 빈번히 마주할 수 있다. 특히 클럽이나 심지어 바의 경우에도 입구에서 옷을 맡기는 데에 적게는 2유로에서 5유로 정도까지 받는 경우를 봤다. 카드결제도 가능하다. 


고리에 번호가 있고, 저 조그만 카드를 확인증처럼 제공한다.


옷을 맡기는 문화가 잘 자리잡아서인지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옷과 물건을 맡기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여러 장소에서도 락커가 비치되어있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직접 맡기는 경우가 거의 다수였던 것 같다. 


1937년 헬싱키시 박물관의 모습. 옷을 걸어주는 일을 하시는 분이 보인다. (출처: http://www.savoyteatteri.fi/fi/esittely)



회사에서도 옷걸이는 필수 가구템


아침에 출근을 하면 각 사무실 앞에 비치된 옷걸이에 다양하게 걸려있는 재킷들을 볼 수 있다. 팀 사람들의 옷이 한데 걸려있으니 아침에 걸려있는 옷만 보고도 누가 출근했는지 알 수 있다. 보통 나는 나의 보스보다 일찍 출근하는 편이거나 옷을 걸 때 마주치는 편이다. 물론 누가 먼저 나중에 출근하는지 거의 상관없지만, 못 보던 옷이 걸려 있으면 궁금하긴 누구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얼마 전 아주 밝은 색의 코트를 입고 출근했는데 아침에 화장실을 가는 길에 마주친 동료가 못 보던 저 코트가 너의 옷이냐며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못 보던 코트가 걸려 있길래 궁금했다고, 사이즈가 어쩐지 너일 것 같아서 물었다고 했다. 나이스 코트라며!


뜻밖의 코트 칭찬

 ‘아직 나는 겨울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데 넌 벌써 봄이구나’ 라며 내 밝은 코트를 칭찬해줬는데 하필이면 그날 하얀색 바지를 입고 있었던 터라 얼떨결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내 마음은 아직 겨울인데


보통 오후 3시나 4시면 사람들이 퇴근을 하기 시작하다 보니, 오후 5시가 넘어 남는 사람들은 늘 정해져 있다. 그건 바로 나. 나는 왜 일찍 출근해도 늦게 퇴근해도 늘 퇴근은 5시가 넘어서야 하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내 DNA에 심어져 있는 6시 퇴근의 법칙이 작용하는지 몰라도, 업무가 일찍 끝나고 다른 일을 한다거나 퇴근하는 길에 내게 말을 거는 누군가 때문에 가방을 어깨에 메고선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결국은 다섯 시 반은 넘어서야 퇴근을 하게 된다. 

칼퇴가 없는데에도 칼퇴의 희열에 적응해버린 나의 직장인 정체성... 여섯시까지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저번에 한 번은 '왜 아시아인 중년 아저씨들은 팔자로 걷는 것이냐'는 주제가 나와서 30분 넘게 나도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왜지? 아시는 분 댓글 좀 부탁해요. 양반걸음에서 유래한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일찍 출근을 하지 않는다. (데헷)


퇴근할 때 옷걸이를 보면 늘 걸려있는 단 두 개의 재킷. 나의 재킷과 나의 보스 재킷. 

사이좋게 걸려있는 단 두개의 자켓. 바로 나의 것과 너의 것. 

왜 우리는 맨날 늦게 퇴근하지? 제가 참 복이 많다고 복덩어리라고 그러더니 바로 일복이었네요? 하하하


박재권님의 당신은 복덩어리. 제가 최고의 일복덩어리.



겨울 필수 패션 템: 방수가 가능한 겨울 재킷, 모자, 장갑



이렇게 겨울이 길기 때문에 그리고 눈도 많이 내리기 때문에, 각종 스포츠 의류를 입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특히 방수가 되는 재킷류를 겨울에는 많이들 입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롱 패딩이 딱히 유행하진 않았다. 특히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주로 스키복을 입고 돌아다니는데 눈밭에 떨어져도 까르르 웃으면서 굴러 다녀도 될 만큼 따뜻해 보인다. 

해맑은 얼라. 겨울내 꼬맹이들의 패션은 거의 이렇다.


올해 2월 초쯤에 격렬한 눈보라가 치던 날이 있었는데, 같이 살던 룸메이트가 그날 ‘올해 처음으로 스키복을 입어본다’ 면서 스키 바지에 스노우 부츠를 신고 할머니랑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어떻게 밖에서 커피를 마시냐며 약속을 바꾸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와 3주 전부터 약속을 했고, 할머니가 정말 맛있는 커피를 함께 마시고 싶어 하기 때문에 가야 한다고 했다. 이 친구는 아직 스무 살도 안된 팔팔한 아이니 그렇다 쳐도 나는 할머니의 핀란드 생활이 가져다준 해탈의 경지를 간접적으로 느꼈달까. 마음속으로 조용히 존경심을 표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하필이면 반강제로 정해진 이삿날로 이사를 해야만 했는데, 정말 고생 끝에 이사를 해냈고 핀란드 생활 적응력이 +100 상승하였습니다.


그날 하루에 내린 눈의 양이다. 우리집 앞이다. ^^ 

이곳의 겨울은 눈이 정말 많이 내리고 제법 추운 날이 많아서 모자와 장갑이 필수다. 한국에서는 모자를 많이 쓰지 않았는데 비니를 쓰면 보온 레벨이 제법 올라간다. 모자며 장갑이며 두터운 외투와 스노우 부츠까지 몸이 무거울 만도 하기 때문에 사무실에 도착하면 그 모든 것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신발도 갈아 신는 편이다. 슬리퍼류를 신는 사람들은 보지 못했지만 다소 편한 스니커즈 타입의 신발을 신는 편이다. 


오후 세시 반쯤 되면 아이들을 픽업하기 위해 퇴근하는 사람들이 한둘씩 나오는데, ‘이젠 엄마로 돌아갈 시간이야, 호호’ 라며 레깅스로 바지를 갈아입고 모자와 장갑을 장착하고 나서는 분도 있었다. 그런 분들은 대체로 아이들 픽업을 하러 갈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분이다. 차량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차림이 가볍기 마련이다. 



겨울과 아주 다른, 극적으로 아름다운 핀란드의 여름


이렇게 긴 겨울을 버티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정말 아름다운 핀란드의 여름이 아닐까.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는 이곳의 여름은 극도로 짧다. 보통 7월과 8월 단 두 달 정도가 여름이라 불리는데, 사실 이곳의 여름은 한국의 봄 날씨와 비슷하달까. 굉장히 따뜻하고 저녁엔 해가 지지 않고 나무들은 푸릇푸릇 싱그럽다. 


지난해 친구네 별장에 놀러가 마주한 핀란드 숲의 여름
헬싱키 시내한복판


하지만 한국처럼 무더운 여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곳의 사람들이 여름옷을 입지 않을까? 응? 그럴 리가. 한겨울에도 파티에 가면 시스루를 입거나 망사 스타킹을 신는 친구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런 친구들을 보면 정말 많은 레이어를 겹쳐 입고 다닌다. 코트 안에 니트 안에 셔츠 안에 티셔츠 안에 시스루를 입는다. 혹은 어릴 적부터 겪어온 겨울에 이미 친숙해진 신체단련의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실내에서도 추워 니트는 필수인데 어렸을 적부터 추위에 단련해온 이곳 친구들은 가끔 반팔을 입는 차력에 가까운 차림을 하기도 한다. 춥냐고 물어보면 그다지 춥지 않다고 하고 며칠 뒤에 감기에 걸려서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경우를 여럿 봤다.



엄마들이 양말을 괜히 신으라고 긴옷을 괜히 입으라구 하는게 아니여


특히 작년 여름에는 유난히도 덥지 않았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나라 사람들이 그렇게도 기다렸던 여름이 왔는데, 정말 더운 날이 없었다. 기억하기로는 20도 이상을 웃도는 날을 손에 꼽았던 것 같다. 옷가게에서 왜 여름옷을 파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평생 입지 못할 드레스를 사는 기분으로 여름옷을 사는 걸까 궁금할 정도로. 그런데 밖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햇빛이 난다는 그 이유 하나로 민소매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나오는 애들이 있었다. 그리고선 아픈 경우를 또 여러 번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따뜻한 날씨를 최대한 즐겨보려는 그들의 열정을 난 높이 산다. 나는 긴 바지에 재킷까지 입고선 찬 바람에 맞설 때 그들은 비키니 차림으로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테라스를 오픈하는 카페가 많아지는데, 그 앞에 공원이 있으면 사람들은 잔디밭에 주저않고 앉아 시간을 보낸다
헬싱키의 여름.  7월 정도 되나보다. (출처: Shutterstock)


 그리고 그렇게 햇빛을 최대한 즐기려는 모습을 나도 점점 닮아가고 있다. 햇빛이 오래 나기 시작하면 집에만 있기보단 늘 어디를 가고파 하는 것이다.


드디어 기온이 영상으로 웃돌고 이번 주말에는 10도 이상 올라간다고 한다. 어제 아침에도 눈이 잠시 내렸지만 어쨌든 엘사는 고향으로 돌아간 듯. 이제 자전거를 신나게 타고 다닐 계절이 드디어 찾아왔다! 하지만 방심하긴 아직 이르다. *(작년엔 5월에도 함박눈이 내렸으므로) 훗. 하지만 길어진 낮만으로도 행복하다.



헬싱키 회사원의 겨울 옷(걸이와 차림)편

핀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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