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드라마가 생겼다
핫 핫 써머 너무 더워 모드였던 5월이 지나가고 10년에 한 번쯤이나 해가 나고 따뜻하다는 미드 서머에 역시나 작년과 같이 차가운 비바람을 몰고 왔다.(Midsummer: 가장 해가 긴 하지 절로 6월 말 정도 되는데, 요상하게 이 시기가 되면 꼭 춥고 비가 내린다.) 미드 서머를 맞이하여 추위를 피하기 위해 조금 더 남쪽인 암스테르담으로 날아갔으나 현실은 헬싱키와 그리 다르지 않은 13도에서 가을 추위를 맞고 돌아왔다.
처음 블로그에 직장생활에 대해 쓰고자 마음먹었을 때는 눈이 정말 많이 내렸던 겨울이었는데 뭐 그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추위는 견…..딜만 하다. 그 당시 때만 해도 이 사무실에는 그 어떤 드라마도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님들 모두 한 번쯤은 또라이 질량 보존법칙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그 또라이 질량의 총량이 이 노잼 구역인 헬싱키에서는 서울보다 혹은 내가 겪었던 어느 회사보다 훨씬 적어서 체감을 못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내가 전체 총량을 느끼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방어막이 존재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ㅍㅍㅅㅅ 참조 https://ppss.kr/archives/19622)
참고로 이는 세계 어디든 인간만 모이면 존재하는 법칙으로 이런 책도 나왔다.
사수의 부재
상사와 부하직원. 참으로 신기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연인도 친구도 동료도 아닌, 이상한 관계. 가르침을 주고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일에 대한 함께 논의도 하지만 지시를 하고 받는 그 오묘한 관계.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여러 명의 사수들을 생각해보면 사람 성격마다, 일하는 스타일마다 조금씩은 달랐지만 보통은 좋은 관계로 끝났던 것 같다. (그리고 날 사수로 삼았던 친구들과도 좋게 끝났는데 그건 나만의 생각일지도? 호호)
이 회사에서 만난 나의 사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글로벌 회사지만 주로 핀인들이 다수를 채우는 사무실에서 몇 안 되는 나와 같은 외국인이고 단 한 번도 나를 부하직원처럼 대한 적이 없다. 부탁하는 일이 있으면 늘 감사해하고 복잡한 일은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내 사수와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서로 일상에 대한 고민도 조금씩은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였는데 그의 상사인 빅보스의 압박에 그가 잠시 일자리를 떠났다. 업무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말 그대로 과부하가 걸린 것. 그의 병가는 1주일에서 2주일로, 급기야 한 달로 늘어났고 곧 그의 여름휴가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와 이어져 총 두 달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 나는 그가 걸린 과부하의 과정을 되짚어볼 수 있게 되는데….
빅 보스의 등장
우리의 빅보스는 지난겨울에 입사한 나름의 뉴페이스로 핀인이 아닌 유러피안으로 같은 자리에 있던 이전 보스와 달리 화끈하고 즉흥적인 스타일이라고 알려졌다. 또한 그는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지 않는다. 조금 특별한 사내 구조 혹은 그의 계약조건 때문에 그는 다른 나라, 다른 사무실에서 일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안 그래도 팀원들과 그 사이의 관계에는 아직도 서먹함이 있었는데 더불어 그를 반기지 않는 팀 내 분위기가 있긴 했다. 나는 그와 직접 일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귀동냥으로 주워듣는 게 전부였는데 나의 사수의 빈자리 덕에 그가 내 생활의 터전으로 등장한 것.
그가 일하는 스타일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 드라마가 생길 법도 하다고 생각이 된 게 이 사람은 도통 남이 보낸 이메일을 읽질 않는다. 그때그때 전화와 문자로 질문을 해결하고 이메일로 보낸 내용들은 확인을 하지 않고 계속 보채기만 한다. 게다가 계획이 없이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해결해 나가는 편. 물론 그만의 계획이 있겠지만 도통 그 생각을 남과는 나누질 않아 다른 팀원들은 알기 힘든 편.
이런 즉흥적인 일 방식 그리고 본인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쏟아내는 직설화법으로 상처받는 팀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커피를 마실 때나 점심을 먹을 때나 그 사람에 대한 불만과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 토픽을 이루게 됐다. 드라마가 시작된 것이다……...
사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그룹에서 꽤 높은 직책을 맡고 있는 이 매력적인 우리의 빅보스와 함께 일하게 되는 행운을 맞이한다...... 우리 팀은 글로벌 팀이기 때문에 각개전투를 벌이는 매니저급들만 모아놓은 팀이고 각자 맡은 분야가 따로 있다. 그래서 나의 사수가 비운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다른 매니저들은 없는 것. 즉 사수와 함께 일한 내가 채워야만 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나는 즉각 전투에 투입되었다. 모든 이메일에 참조되는 것은 기본이고 정말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별의별 일에 동참하게 된다. 하지만 난 나의 분수를 잘 알았기 때문에 퇴근 시간이 지나고 나면 칼같이 윈도우를 종료시키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에 앉아있는 시간 내내 셀 수 없이 많은 이메일과 채팅과 미팅으로 숨이 막혔다. 그럼 돈을 더 주던가?
Boss니까 Bossy 하게?
내가 지금까지 만난 핀란드인들의 다수는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다. 감정에 예민한 사람들은 정말 많이 보았지만 회사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그러니까 친구가 아닌 누구에게 그런 예민한 감정들을 드러내질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빅보스의 직설적인 화법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직급이 높은 상사라는 그의 위치적 권력을 보이기 위해 본인의 바쁜 일상을 과시한다던가 충분한 설명 없이 일을 지시하는 것에 대해 주변 동료들은 불편함을 느꼈다. 상사라고 해서 가진 권력을 과시하면서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은 정말 멋없는 행동인 것은 사실.
나와 동료는 그의 일방식보다는 그가 다른 사람들을 하대하는 태도에 대해 주로 대화를 나눴다. 계획이 부족해 보이긴 하지만 닥치는 대로 무언가 해나가기 때문에 그가 어쨌든 할 일은 해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비교적 서울에서 다양한 또라이들을 겪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체내화된 면역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 사람의 특이한 면모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꽤 특이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의 강한 표현 방식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의견 등등. 왜 이런 또라이들이 늘 높은 위치에서 많은 돈을 받으면서 여러 사람을 괴롭히는 걸까. 세상은 요지경. 본인이 상사이기 때문에 권력자처럼 굴어도 된다는 개인 권력의 도취는 인간 본능인 것일까.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들은 다 만화책 안에만 이쏘…
동료의 빈자리, 나머지 일. 누구의 일일까?
사수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요 몇 주 정말 바쁜 시간들을 보냈는데, 나의 그런 모습이 옆에서도 보이기 시작했는지 다른 동료들이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지나치게 많진 않은지, 빅보스가 내게 무리한 요구를 하진 않는지 아니면 내가 스트레스받을만한 상황이었는지에 대한 등등 업무적으로라도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알려달라며 쏘 스윗한 격려들을 해주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내게 한 말: 넌 아직 트레이니 계약이지 않아? 그 많은 일들은 네가 해야 할 일이 아니야. 너야 말로 못할 일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위치니까 No라고 얘기해!
말이 쉽지.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대활 걸어주는 빅보스의 분단위 요구를 매번 거절할 수도 없고, 또 할 수 있는 일을 못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인턴이더라도 나도 일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이런저런 일을 했던 세월이 도합 7년은 된다. 눈에 보이는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이 대목에서 으이그 이 서울 사람아!! 하는 독자들이 계실 거다. 나도 알고 있다.... 내 뼛속에 심어진 이 이.. 이..... 서울러의 피....!! 그래서 나는 일을 최대한 천천히 했다. 그리고 퇴근시간이 되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윈도우와 회사 폰을 종료시켰다. 나름의 방어막을 그렇게 쌓았다.
사수가 떠난 첫 주, 나는 금요일만을 미친 듯이 기다렸다. 전에는 하지 않아도 될 업무가 늘어나자 내가 동시에 진행하고 있던 회사 밖의 개인 프로젝트에도 차질이 생긴 것이다. 그 금요일, 사수가 더 많은 휴식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을 때 나는 그다음 금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또 한 번 그가 더 쉬어야겠다고 연락이 왔을 때는 상황이 단순하게 해결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나의 동료들은 그가 돌아오지 말고 더 오래 쉬어야 한다고 했다.
... 뭐라고? 그럼 난 어떡하라고.
그들의 의견은, 스트레스 요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돌아와도 힘든 상황이 반복될게 뻔하기 때문에 지금 해결책이 없는 상태에서 내 사수가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일은 일, 삶은 삶이기 때문에 삶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견. 해야 될 일이 되지 않는 사태를 맞이하고 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상부조직에서 조직적 개편을 하던지 직원을 늘리는 방향으로 어떤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는 회사에서 사람을 마음대로 해고시키기 힘든 문화적 제도적 배경과 더불어 대다수가 일보다는 삶의 건강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회적 합의에 가까운 그들만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명의 직원이 사라져서 그 업무를 그대로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업무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시선이 아니라, 일하는 직원이 받아야 할 기본적 대우로 제대로 된 업무 환경이 갖춰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들 연거푸 이야기했다. 그래... 맞는 말이야.
이렇게 일과 개인의 생활을 철저히 구분해서 개인의 삶을 중요시하는 문화에서 핀란드의 높은 행복지수의 요인을 발견했다. 일은 일, 삶은 삶. 그리고 그걸 모두 받아들이는 태도. 이렇게 되니 비즈니스 속도는 느린 편이다. 그래도 굴러간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들은 행복의 기준이 높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먹고살기 힘들면 가져보지 못한 여유 속에서 오히려 행복에 대한 판타지가 커지는 것 같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내 사수는 그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아마도 여름이 거의 다 지나갈 무렵인 8월 중순이 되어야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다행히도 나의 휴가와 동시에 빅보스의 이메일 주요 참조인에서 벗어났다. 그가 해결해야 했던 내 사수의 업무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고 또 그가 의지해야 하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나의 휴가기간 동안 나에서 다른 사람으로 옮겨갔기 때문. 그 소용돌이가 또 언제 나에게 돌아올지 모른다. 그래도 좋은 소식은 내 사수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채용하기로 한 것. 그렇다고 내 사수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일을 세분화시켜서 결과적으로는 내 사수의 업무가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빅보스는 여전히 팀에 남아있다. 그가 얼만큼의 일을 해내고 있는지 어떤 결과물을 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빅보스와 팀 사이의 불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어느 드라마도 생기지 않는 이 노잼 존에서…. 급작스럽게 드라마의 소용돌이에 말렸다가 나오니 서울에서의 생활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또라이력에도 그리 놀라지 않는 나 자신을 보며 많은 서울러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여러분은 강합니다… 어딜 가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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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호수같이 잔잔하던 일상에 파도가 일게 한 것은 역시나 핀인이 아닌 외국인.
이 불같은 빅보스는 과연 핀란드 호수의 찬물에 냉수 샤워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핀란드 호수 옆의 숲을 태워 호수를 말릴 것인가….
헬싱키 회사원이 만난 첫 드라마
핀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