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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윤미 Mar 03. 2022

렌즈가 달린 마음

웹진 '월간 시화사'

묵은지가 되어버린 구형 카메라의 무게를 핑계 삼아 가볍고 날쌘 신형 카메라를 새로 사기까지 십 년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기발한 핑계 덕분에 목에 건 카메라가 가슴팍에서 팔딱팔딱 튀어 오를 때마다 심장부 어딘가에 렌즈를 삽입하는 기분이 들었지요. 카메라 하나 손에 들었을 뿐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름답게 돌변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아 맞다! 사진이 이래서 좋았었지.’


지나가는 사람, 스치는 장면에 불과했던 것들이 눈에 조여들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모델이 되고, 저 물체는 기록으로 남고, 저 장면은 풍경으로 만들기 위해 사사건건 참견하는 카메라맨이 되어버렸거든요. 딱히 기술도 심지어 기능도 모르는 용기로 말입니다.

저 들판에 서 있는 트랙터로 추정되는 빈티지한 자동차가 원래라면 시야에도 들어오지 않았을 테지만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의 속도로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면 안 된다고 경고하며 손가락에 살얼음이 차오를 때까지 셔터 누르기를 반복합니다. 너를 가장 아름답게 보기로 작정했으니까요. 가본 적도 없는 북유럽의 시골 마을을 연상하며 이 순간을 겨울왕국의 한 귀퉁이로 보관합니다.

우연히 마주한 공사 현장에 나부끼는 공구들은 렌즈를 투과하기만 하면 낡고 거칠고 더러운 게 아닌 과연 멋진 사물로 부활하고야 말지요. 벗겨진 페인트를 비집고 나온 나뭇결은 고풍스러움이라 결단하고 한 번도 집중해 본 적 없는 원형 너트의 곡선미에 빠져듭니다.


웃음소리가 만연한 두 아이의 일상을 잘만 포착한다면 나의 좋은 기억력은 세심한 청각을 되살려 한 장 사진에서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거란 야심까지 생겨나지요. 그것이 바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의 특권.

판화의 종류 중에 에칭이 있습니다. 동판에 바늘 칼로 그림을 그린 후 부식시켜 작업하는 방식인데 펜화로 착각하리만큼 미세한 표현이 가능하지요. 전시회에서 에칭 작품을 관람할 때면 흑백 사진처럼 보이는 비현실적인 완성도에 문득 가만히 떨군 내 손을 두고 비루한 감정까지 복받쳐 오릅니다.


촘촘한 작업은 방대한 기록과 거대한 여운을 남기는 법이죠. 렌즈를 들고 있는 순간이 그러합니다. 시선의 자락에서 모든 시간의 단면을 켜켜이 잡아내 에칭과도 같이 판형에 담고 속 깊은 마음으로 모두는 좋은 것이라 욱여넣습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바닥에 나부끼다 비질을 해도 오랜 걸음으로 단화가 발가락에 통증을 남겨도 괘념치 않고 말입니다.


렌즈가 달린 이 마음이면 썩 괜찮은 인생관에 우쭐할 것도 같습니다. 최소한 남들보다 한참 많은 것을 한껏 아름답게 보느라 시간을 탕진했으니 나쁜 생각이 껴들 틈이 없었거든요. 애쓰지 않아도 일상은 그저 감사이기도 했고요. 모두의 가슴팍에 렌즈가 달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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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웹진 '월간 시화사'의 요청으로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https://blog.naver.com/sihwasa/222661598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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