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이 출간되었을 때 의외로 봇물이 터진 건 주변의 ‘쓰밍아웃’이었다. 한때 자신도 문학소녀였다는 고백, 작가를 꿈꿔본 적 있다는 자백, 여전히 글을 즐겨 쓴다는 실토가 내게로 쏟아졌다.
사람들은 쓰고 싶어 하는구나!
줄곧 질문도 이어졌다. “도대체 작가님은 책을 얼마나 많이 읽은 거예요?” 이를테면, 잘 쓰는 비법이라도 있냐는 물음이었고, 보나 마나 그 비법은 책일 거란 추측이었다. 아니다. 비법은 책이 아니라 세 치 혀였다.
15년 이상 나는 국내는 물론 미국과 캐나다에서 만 5세부터 만 80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던 사람이다. 대단할 거야 없었다. 그냥 돈 벌어야 했고, 때때마다 있는 곳에서 취업한 결과일 뿐 쭈글쭈글한 과거사 풀면 그것만도 전집 나온다. (그 전집 베스트 셀러 되었으면~)
강의에서 유일하게 신경 쓴 부분은 하나였다.강의는 정확하고 유익해야 하며, 어려운 내용일수록 쉽게 가르칠 것‼
만에 하나 이해가 쉽지 않을 때를 대비해 소설가가 플롯을 짜듯 강의 중간중간 농담 한 구절과 목소리 톤까지 설정해 재미도 더했다. 단지 말의 효율을 높이잔 생각으로 나이대별 필요를 충족시켰을 뿐인데, 알고 보니 이게 참 좋은 말이었던 거다. 훗날 우연히 글을 쓸 때, 그 말을 글로 옮겼더니 고맙게도 좋은 글이란 평을 받았다. 세 치 혀에게 박수~~~
말하기와 듣기는 세트지만, 읽기와 쓰기는 엄연히 말해 세트가 아니다. 읽기가 ‘활자화된 듣기’라면, 쓰기는 ‘활자화된 말하기’이기 때문이다. 듣기와 읽기가 세트, 말하기와 쓰기가 세트다.
재밌는 건 듣기와 쓰기도 결국 세트다. 좋은 글은 좋은 말에서 나오고, 좋은 말은 경청으로부터 나오니까 말이다. 결국 좋은 글은 듣기나 활자화된 듣기(읽기)에서 시작되는데, 이때 중요한 건 '많이'가 아니라 '적용'이다. 하나를 듣더라도 저렇게 말하니까 재밌구나, 위로되는구나, 반대로 밉상이구나, 뭔 말인지 모르겠구나 등의 분별과 이해를 내 말로 옮길 줄 알아야 한단 뜻이다.
좋은 글은 읽히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 글의 첫 독자가 된다. 첫 책을 퇴고할 때 가까운 인쇄소에서 초고 가제본을 만들어 읽었었다. 예상치 못하게 나는 울어버렸다. 내 목소리를 내가 듣는 건 ‘나’라는 ‘우주’를 구하는 일이었는가 보다. 우주 정복 완료! 이 하나만으로 당신은 쓸 명분이 충분하지 않을까. 다음 시간 마지막 강의 ‘문해력’으로 돌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