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5_ 영화「서편제 西便制」_ 감독 임권택_1993
“갈까부다, 갈까부다, 님을 따라서 갈까부다. 천리라도 따러가고 만리라도 따러 나는 가지. 바람도 수여 넘고 구름도 수여 넘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모두 다 수여 넘는 동설령 고개 우리 님이 왔다 허면 나는 발 벗고 아니 쉬여 넘으련만 어이허여 못 가는고. 무정하여 아주 잊고 일장수세가 돈절헌가, 뉘년의 꼬임을 듣고 여엉 이별이 되얐는가? 하날으 직녀성은 은하수가 맥혔어도 일년일도 보건마는 우리 님 계신 곳은 무삼 물이 맥혔기로 이다지도 못 오시나? 이제라도 내가 죽어 삼월동풍 연자되여 임 계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노니다가 밤중만 임을 만나 만단정회를 풀어 볼거나. 아이고 아이고 내 신세야! 내 신세는 어쩔거나?”
영화 「서편제」는 춘향가의 이 대목과 함께 시작하여 심청가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으로 끝맺는다. 그리움으로 찾아가고, 그리움으로 기다려 온 남매-동호와 송화-가 만나던 날 밤, 그 주막에서는 심청가와 북장단이 밤새도록 이어진다. 그 소리와 장단은 몸을 대지 않고도 능히 서로를 희롱하고 서로를 보듬어 안는 듯하였다. 이튿날 아침, 이들은 서로 말없이 헤어진다. 그리고 송화는 말한다.
“恨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지요.”
“우리는 지난밤 恨을 풀어냈어요.”
송화의 이 대사는 막연하기 그지없다. ‘한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라는 말이 어떻게 오랫동안 서로를 찾고 기다려온 이들이 모르는 사람인 체 다시 헤어지는 이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지난밤 한을 풀어냈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그 풀어냈다는 한은 다치고 싶지 않은 한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이들은 서로 그리워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사연이 이들을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헤어지도록 하는 것일까?
아버지, 누나, 동생으로 등장하는 유봉, 송화, 동호는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다. 송화는 유봉이 소리를 가르치려고 데리고 다니는 고아이고, 동호 역시 유봉이 한때 살을 맞댄 과부 여인의 자식일 뿐, 유봉과는 혈연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관계인가? 핏줄이 아닌 그 어떤 관계가 이들을 붙잡아 매고 있는가?
동호 어머니의 죽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유봉이 송화와 동호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서편제」는 유봉이 송화와 동호에게 판소리를 전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교육적 상황의 복잡성과 미묘함을 다루고 있다. 유봉과 송화 혹은 유봉과 동호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이 거리는 판소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좁혀진다. 다소 유머러스하게 표현되는 영화의 몇 장면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초기 단계를 잘 보여준다. 배우는 일, 소리의 세계에 입문하는 일은 이렇게 시작된다. 명랑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좌절과 눈물이 동반된다.
표면상으로 보면 이들 세 사람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은 ‘소리’이다. 그러나 유봉의 말대로 소리가 ‘한’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이들의 관계는 ‘한’으로 성립된, 다시 말하여 ‘한’을 전수하고 전수받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다. 한은 언제나 고정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맺히고 풀리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점점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은 언제나 동일한-송화와 동호가 지난밤 풀어낸 한, 송화가 다치고 싶지 않은 한, 풀어낸 순간 다시 껴안고 살아야 할- 한이다. 「서편제」는 결국 ‘소리’를 표면에 내세운 한의 이야기이다.
소리의 세계 앞에 서 있는 입문자라는 점에서 송화와 동호가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며, 그것은 거리를 좁히는 일을 하는 그들의 태도-소리할 때의 송화와 북장단을 하는 동호의 표정-에서 잘 드러난다. ‘소리를 하면 뭐가 나오는가’라는 동호의 질문과 ‘소리를 하면 모든 것을 잊는다’는 송화의 대답은 그들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비록 술집에서, 약장수를 따라다니면서 소리를 하고 있지만, 송화는 소리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잊는다. 그러나 동호는 거의 불만으로 일관된 표정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생각으로 괴로워한다. 이러한 동호의 상태는 동호와 소리 사이의 순수한 만남을 허락하지 않고, 급기야 송화의 소리까지 가로막는다. 그의 북장단은 소리가 나아갈 길을 닦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소리를 방해한다. 그동안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던 유봉은 결국 소리판에서 동호를 내동댕이친다. 그날 저녁, 유봉은 동호에게 호소한다. 북이 무엇인가, 소리와 장단은 어떤 관계인가, 너는 어떤 모습인가……. 동호는 여전히 무감동하다.
동호는 소리의 맛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일까? ‘정 때문에’ 혹은 ‘누나에 대한 애정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억지로 북을 치고 있었던 것일까? 유봉은 동호가 재능이 없음에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동호에게 북을 가르친 것일까? 동호는 정말 재능이 없었던 것일까?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걸어오는 롱 테이크 씬은, 동호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소리에서부터 소리에 포섭되어 가는, 그리고 그 소리에 사로잡혀 있는 동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송화와 동호는 차이를 보인다. 아버지의 선창에 이어지는 송화의 응창에도 불구하고 동호의 북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다. 아버지와 송화의 소리가 동호를 끌어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마침내 그 소리의 힘이 동호를 흔들게 되고 동호는 서서히 북을 내린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셋은 하나가 된다. 이들의 어우러짐-그 속에서 저절로 흥과 춤이 생긴다. 소리는 흥을 낳고 흥은 손과 발을 춤추게 한다. 이 순간에는 어떤 근심도, 불만도 있을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흥이다. 흥을 타는, 흥을 태우는 몸뿐이다.
이 한바탕 어우러짐이 끝나면서 카메라는 회오리바람이 스산하게 스쳐 가는 땅을 비춘다. 이 장면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던 흥이 일시에 흩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흥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과연 어디엔가로 갔는가? 갔다면 어디로 갔는가?
이 극적 어우러짐은 약장수 부부에게서 쫓겨난 직후, 그러니까 결코 흥이 생길 것 같지 않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흥의 발생이 바깥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흥은 어우러짐 속에, 그 어우러짐을 구현하는 사람들-소리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 흥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운동하는 것으로서, 순간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 순간을 구현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몸이다. 사람의 몸을 빌지 않고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흥은 사람들-소리의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속에서 꿈틀거리면서 때를 기다린다. 그렇기 때문에 흥은 계속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또 사라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약은 흥이 무엇인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소리를 도둑질하는 앵무새, 그러나 앵무새가 훔친 소리는 ‘소리’일 수 없다. 똑같이 ‘좋다’‘얼씨구’라는 소리를 낸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송화의 ‘좋다’‘얼씨구’일 수 없다. 마약은 앵무새의 반대편에서 흥의 의미를 더욱더 한정한다. 이것은 마약과 흥의 미묘한 관계가 흥의 이면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약은 황홀감을 가져다 주지만 그것은 소리에서 느끼는 그 황홀감과 결코 동일한 것일 수 없다. 소리의 황홀감은 반드시 ‘마음’이라는 여과 장치를 통해서만 가질 수 있다. 이 여과 장치를 젖혀두고 황홀감 그 자체를 직접 맛보고 싶을 때, 사람들은 마약으로 손을 뻗게 된다. 소리의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속이 아니고서는 살아있을 수 없다.
그 아름다움을 지키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한 번의 ‘순간’으로 그 아름다움이 영원히 보장된다면 절망이나 노력이라는 말은 무의미할 것이다. ‘순간’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한 번 이루어졌다고 해서 계속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그 순간은 ‘반복’을 기다리며, 반복은 몸을 요구한다. 그 순간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소리를 배우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배움이 언제나 흥의 순간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 또한 아니다. 흥은 처절한 몸짓과 지루한 기다림을 밟고서 그야말로 은총처럼, 어쩌다 한번 폭발할 뿐이다. 송화에게 가르치기 위해 (마약을 살 돈이 필요한 친구에게 돈을 주고) ‘귀곡성’을 배워오는 아버지와 헛간에서 ‘귀곡성’을 토해내는 송화의 모습은 이 일이 어떤 일인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동호는 떠난다. 그는 아직 그의 몸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소리의 부름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듣고도 일부러 외면할 것일까? 아직 동호를 불러 세울 만큼 강하지 못한 그 소리는 동호의 몸에 깊숙이 감추어진 채 그를 따라간다. 동호는 그가 듣지 못한 것, 아니면 그가 외면한 것을 그의 몸속에 함께 데리고 떠난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바로 그 소리라는 것을 모르는 채.
동호가 떠나자 송화는 앓아눕는다. 이제 송화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 무엇이 송화를 앓아눕게 하고, 소리마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송화와 동호는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그들은 서로 사랑했던 것일까? 그래서 송화는 상사병으로 앓아누워 소리까지 못하게 된 것일까? 갈 수만 있다면 아버지를 버리고 동호와 가고 싶었던 것일까? 동호의 가출을 아버지 탓이라 여겨 아버지에 대해 오기를 부리는 것일까? 아니면 동호의 떠남으로 해서 소리에 대한 회의가 생긴 것일까? 소리 밖 세상에 대해 유혹을 느낀 것일까? 이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쩌면 송화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동생이 나가게 된 데는 내 탓도 있다, 동생이 어디에서 어떻게 방황하는지도 모르면서 나 혼자 아버지 말씀에 따라 노래하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동생이 나간 이유의 한 부분에 이미 내가 관여되어 있는데, 그리고 정말 나는 동생과 달리 소리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일까, 등등. 어떤 이유에서든 송화의 행위는 동호의 가출로 마음이 동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은 비록 ‘소리를 하면 모든 것을 잊는다’고 했지만, 소리에만 몰두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송화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한계는 유봉의 눈에만 보일 뿐, 현재의 송화에게는 결코 한계가 아니다. 그것은 최선이다. 이것을 한계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이며, 그는 그가 속해 있는 소리의 세계에 비추어 송화의 상태를 인식한다.
아버지가 내린 처방은 ‘눈을 멀게 하는 것’이었다. 이 극약 처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눈을 없앰으로써 듣게 하려는 소리는 정말 눈이 없어져야 들을 수 있는 것인가? 소리를 위해서 한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이기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소리를 위해서라 해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그런 행위를 해도 되는가?
가치로운 세계에 누군가를 입문시키고자 할 때 미리 상대방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교육이라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할 것이다. 그 상대방이 미리 허락받지 않았다고 원망한다면 그는 사랑의 상대를 잘못 보았음을, 그를 제대로 입문시키지 못했음을 슬퍼할 수밖에 없다. 한 세계로의 입문은 이런 방식으로서만 가능하다. 다른 방법 운운하면서 이 일에 대해서 문제 삼는 것은 그 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저항은 언제고 있을 수 있으며, 저항이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일은 더욱 의미를 지닌다.
송화에게 약을 먹일 때나 송화의 눈이 멀게 되었을 때 동요의 빛을 찾아볼 수 없는 유봉의 표정은, 그의 가슴에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밀이 담겨 있음을 나타낸다. 딸의 눈을 멀게 하기까지, 그리고 그 순간에 그가 느꼈을 온갖 인간적인 비애가 무표정으로 나오게 하는 무엇, 그 무엇이 있다. 그의 온 존재가 구속당하고 있는 ‘소리’, 그 소리에 대한 열정이 아니고서는 이 일은 불가능하다.
눈이 멀고 나서도 송화는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극약 처방은 하나의 조건일 뿐, 그 자체로 소리를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처방으로서 의미를 지니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송화의 마음이 개입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그 행위가 송화에게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눈이 멀고 나서 다시 소리를 하겠다고 하기까지 송화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유봉이 눈을 멀게 했음을 확신하는 순간이 바로 소리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봉의 마음이 송화의 마음을 비추어 내기 때문이다. 유봉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송화는 자신의 마음을 대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다 심각한 고뇌를 짊어지고 있는 유봉의 존재로 인하여 송화는 위로받을 수 있었다.
소리재.
“소리 공부하기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유봉의 이 대사는 소리재에서 그들이 할 일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훔쳐온 닭 때문에 몰매 맞고 난 다음 ‘거 목청 한번 좋다’고 말하는 유봉의 모습에서 이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소리재에서, 아버지와 살면서 송화의 한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한다. 소리재에서의 삶은 송화로 하여금 피를 토해 내게 하고 몸부림치게 한다. 이제 송화의 소리는 그저 예쁘기만 한 아이의 소리가 아니다. 소리를 내기 위해 산을 향해 피를 토하는 송화와 그 몸부림을 지켜보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한이 첩첩 쌓인다. 그러고 나서 유봉은 송화의 가슴에 마지막 한을 심는다. ‘한에 묻힌 소리가 아니라 한을 넘어선 소리를 하라’는 말과 함께 유봉은 이 세상을 떠난다. 이제 한은 송화 혼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아버지를 대행할 사람이 없다는 것, 그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 송화의 소리를 한의 소리에서 득음의 소리로 넘겨줄 북장단이 없다는 것, 그것이 이제 송화의 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말씀하고 가셨다.
“한을 넘어서면 동편, 서편이 없다. 득음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아버지 삼년상을 치른 후 송화는 떠돌아다닌다. 떠돌아다니면서 동호를 기다린다. 이때의 기다림은 그 옛날 동호가 떠났을 당시 나무 아래서 기다리던 그 기다림이 아니다. 이제야 송화는 동호를 기다릴 때가 되었다.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송화는 동호가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들의 한이 소리에 있음을 송화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못 돌아오고, 못 넘어가는 동호와 송화의 한은 한순간에 동시에 해소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동호는 올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만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득음의 경지가 어떤 상태인가를 잘 보여준다. 눈물의 의미, 그리고 눈물이 멎는 순간, 이 장면에서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을 부르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아버지- 아버지- 심청이만의 흐느낌이 아니다. 눈물이 멎는 순간, 그 순간은 지금까지 귀로 듣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귀가 아닌 눈으로 소리를 보게 되는, 모든 것이 정지된 고요한 시간이다. 영화의 장면은 그런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은 바로 영원 그 자체라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로서는 송화가 눈 뜬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그 경지를 일컫는 ‘득음’이라는 단어를 알 뿐이다. 송화는 ‘우리는 한을 풀어냈어요’라는 말 이상을 들려주지 않는다.
‘누가 장님을 데리고 살려고 하겠는가’
이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송화는 곱게 빗어 올린 머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아이를 앞세우고 떠난다. 천년을 살기 위해, 나비와도 같이.
“제 팔자를 생각해 보면 당치도 않게 편한 세월이 너무 길었었나 봐요. 이젠 그만 어디론가 몸을 좀 옮겨야 할 때가 되었지요.”
* 선생이 되기 전, 아직 학생이었던 시절에 이 글을 썼다. 오늘 타이핑 작업을 하며 문장을 다듬었다. ‘생각’은 건드리지 않고 그냥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