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ria 윤집궐중 Jan 31. 2022

40. 가드닝 이야기가 맞나요

산수유 4_ [정원가의 열두 달)_카렐 차페크_ 펜연필독약


"수라상에나 올리는 귀한 과일입니다. 감히 받들 수 없으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귀하다 한들 그저 과일일 뿐인데 받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송구하옵니다."
"순순히 받고 기뻐해라. 그러면 되질 않느냐."
"귀한 것입니다. 소인에겐 과분한 것이지요. 하여 사양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원치 않는 것이옵니다. 한낱 궁녀에게는 처음부터 사양할 자유조차 없는 것이옵니까? 부디 소인이 사양할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우리가 지금... 감귤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느냐?"

                                                                                                   <옷소매 붉은 끝동 7화>



볕이 좋아서였을까? 제라늄 화분에 물을 주다가 시든 잎을 떼어주고 화분을 돌려주고 자리도 옮겨 주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식탁에 앉아 <정원가의 열두 달>을 펼쳐 들었다. 작년 이맘때 읽다가 두었던 책인데 조그맣고 소박한 모양새는 눈으로, 표지(크래프트지?)는 손으로 자꾸 쓰다듬게 된다. 한 페이지에서 몇 번씩 웃으며 읽었던 기억 그대로다. 몇 문장 읽지도 않았는데 자꾸 웃음이 삐져나온다. 슬며시 농담을 던지고, 가볍게 핀잔하면 신이 나서 말장난을 이어가는 후배 녀석과 마주 앉아 있는 느낌이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정원가의 열두 달>_카렐 차페크 글, 요제프 차페크 그림_펜연필독약


내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첫 페이지부터 쏟아지는 유머러스함에 매료되어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문장이다. 그렇다. 무언가를 가꾸어 보아야, 어떤 대상에 마음을 쏟고 공을 들여 보아야 지금까지  나를 키우고 지금도 나를 지탱해주는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아담은 우리 어린아이들처럼 기어코 설익은 열매를 땄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 그로 인해 선악과는 영원히 익지 못한 채 남게 되었다.

소년들은 정원에서 땀방울을 흘리기보단 소녀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거나 자신의 야망을 좇고, 직접 키우지도 않은 인생의 열매를 무분별하게 따 먹는다. 그 행동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미처 알지 못한 채.

인간이 정원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성숙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나는 이를 ‘부모의 마음’을 갖춘 때로 본다. 그리고 또 하나, 자기만의 정원이 있어야 한다.

<정원가의 열두 달> _ 인간은 어떻게 정원가로 다시 태어나는가


에덴동산 선악과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그로 인하여 인간이 '추방'되었다는 것에만 주목했을 뿐, 선악과가 영원히 익지 못한 채 남게 되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은 소년들,  '직접 키우지도 않은 인생의 열매를 무분별하게 따 먹는, 그 행동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미처 알지 못하는 소년들', 그러니까 바로 '그런 우리들에게' 카렐 차페크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부모의 마음을 갖춘' 어른이 되라고. 정원가로 다시 태어나라고.    


작년에 읽을 때에도 이 책이 그저 '가드닝'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눈치챘었다. 그러나 유머와 위트  속에 깃든 시선이 너무도 정확해서, 거기에 맞장구치며 웃느라 그 너머에 있는 내밀한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필사를 하며 다시 읽으니 전에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울림이 따스하고 깊다. 카렐 차페크의 '쉽고 가벼운' 문체는,  물론 그 바탕에 선하고 유쾌한 천성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을 테지만, 단순히 그의 취향이 그래서가 아니라 섬세한 고려의 결과였을 것이다.  전달하는 행위는 언제나 오해와 왜곡의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은 전달의 문제를  고심할 수밖에 없고, 그 이야기가 묵직하고 소중할수록, 과녁이 분명할수록 더욱 그럴 테니까. 


내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부단히 깨우쳐 주는 손바닥만 한 정원, 나에게 그것은 제라늄 화분들이 있는 베란다이고,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들과 함께 사는 집이며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있는 교실이다. 그리고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부모님과 이웃이다. 정원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의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기만의 정원'이 있어야 한다면, 내게 후자는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셈이다. 성숙한 마음가짐을 지닌, 부모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카렐 차페크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이고 싶어졌다. 그는 결코 고압적인 목소리로 당위를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촌철의 유머와 위트로 나를 정확하게 풍자할 것이다. 


(호스와의 사투)

이 짓을 매일 반복하며 두 주쯤 보내고 나면 잔디를 심은 자리에서 잡초가 돋아나기 시작한다. 자연의 불가사의다. 분명 최상품 잔디 씨를 뿌렸는데 대체 어떤 연유로 이렇듯 무성한 잡초들이 자라는 것일까? 잡초 씨를 뿌린다면 멋진 잔디를 볼 수 있으려나?

<정원가의 열두 달> _ 정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누가 가드닝을 목가적이고 명상적인 일이라고 했나. 마음을 바쳐서 하는 모든 일들이 그렇듯, 가드닝 역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열정 그 자체다.

<정원가의 열두 달> _ 인간은 어떻게 정원가로 다시 태어나는가
작가의 이전글 39. 공감의 문제(feat. 옷소매 붉은 끝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