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층 위를 유영하며

정착이 해답이 되지 못하는 순간들

by 서랑

한국은 한때 내 정념이 응고되던 장소였고, 이제는 풍화된 감각의 지층. 기억 속 나의 잔상이 남아 있는 조용한 침전지에 가깝다.

호주는 다층적 문화의 교차점. 나는 그 접촉면에서 항상 낯선 언어의 파열과 미묘한 정서적 위상차를 감내한다. 여기서도 나는 조금씩 어긋나 있고, 그 어긋남은 나를 설명하는 방식이 된다.

정착은 나를 해명하지 못했고, 나는 여전히 응답 없는 시선 속에서 반사된 자아를 관측하는 중이다. 그러나 그 반사광은 차가운 투영이 아니라 이제는 나를 비추는 또 하나의 방법. 그것은 조용한 감응이며, 예민한 자기 인식의 수단이다.

나는 귀속의 구조에서 이탈한 채, 혼란한 자아들의 퇴적층을 유영한다. 정체성은 응집된 형태가 아닌, 잦은 마찰과 미세한 균열을 통과해 누적된 흔적. 애착은 어느 순간부터 닻이 아닌, 조용히 미끄러지는 관성의 파동이다. 관계는 응집보다는 교차이며, 연결보다는 스며듦이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감도가 언제 가장 왜곡되고, 어느 틈에서 진동하는지를 관찰한다.

끝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다. 종결이 있어야 경험이라 불리운다. 지속은 일상이고, 단절은 이해의 문장이 된다. 관계를 하나의 이야기로, 그 안에서 퇴적되는 감정의 흐름으로 바라본다.

정체성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나는 타인의 시선과 말투, 온도에서 수없이 굴절되는 나를 느끼고, 그 굴절을 통해 새로운 나의 단면을 인지한다. 나는 지금 누구의 문화에도, 어느 지층에도 완전히 편입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질감은 세계와 나를 더 세밀하게 분리해보게 한다.

정주하지 않음은 결핍이 아니라, 존재의 해상도를 높이는 선택. 나는 느슨한 접속을 경유하며, 지금 이 순간도, 조금씩 나의 본질을 탐험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