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한 스포, 아니 사실 그대로 베껴옴
나는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나의 생활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곰곰 생각해 봐도 나는 불행하진 않았다. 학생 때에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러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59p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하고 마리는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고 설명을 했다. 게다가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녀 쪽이고, 나는 그저 승낙을 했을 뿐이다. 그러자 마리는, 결혼이란 건 중대한 일이라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아니야"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기와 같은 관계로 맺어진 다른 여자로부터 같은 청혼이 있었어도 승낙을 했을 것인가, 다만 그것만이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는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생각해 보는 듯했으나,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길이 없었다. 잠시 또 묵묵히 있다가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이상스러운 사람이라고, 아마 그 때문에 자기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 테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내가 싫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더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노라니까, 마리는 웃으면서 내 팔을 붙들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든지 그녀가 원한다면 곧 결혼을 하자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장의 제안을 이야기해 주니까, 마리는 파리를 알고 싶다고 했다. 내가 잠시 파리에서 살아본 일이 있다고 말했더니, 어떻더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해 주었다. "더러워. 비둘기들과 컴컴한 안뜰들이 있어. 사람들은 모두 피부가 허옇고." -60p
마리는 나와 헤엄을 치고 싶어 했다. 나는 뒤로 돌아가 마리의 허리를 붙잡고, 마리가 팔을 놀려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발로 물장구를 쳐서 도와주었다. 고요한 아침에 물을 때리는 나직한 소리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고, 마침내 나는 지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마리를 남겨두고, 숨을 크게 쉬면서 규칙적으로 헤엄을 쳐서 돌아왔다. 바닷가로 나와서 나는 마송 옆에 배를 깔고 엎드려 모래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참 기분이 좋은데요." 했더니, 그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마리가 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리가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 70p
조금 전과 다름없이 시뻘건 폭발은 그대로였다. 모래 위에서 바다는 잔물결들의 급하고 가쁜 숨결을 다하여 헐떡거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바위께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햇빛이 쬐어 이마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더위 전체가 내 위로 내리눌러대면서 나의 걸음을 막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얼굴 위에 엄청나게 무더운 바람이 와닿을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바지 호주머니 속에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태양과 태양이 쏟아부어주는 그 영문 모를 취기를 견뎌 이기려고 전력을 다해 몸을 버티는 것이다. 모래나 흰 조개껍질이나 유리 조각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칼날처럼 번뜩일 때마다 양쪽 턱뼈가 움찔했다. 나는 오랫동안 걸었다. -73p
그러나 나는 자문해 보는 습관을 좀 잃어버려서,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그러자 변호사는 내 말을 가로막았는데, 매우 흥분한 듯이 보였다. 그는, 그러한 말은 법정에서나 예심 판사의 방에서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나를 다그쳤다. 그러나 나는, 원래 육체적 욕구에 밀려 감정은 뒷전이 되는 그런 천성이라고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날, 나는 매우 피곤했고 졸렸다. 그렇기 때문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엄마가 죽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변호사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85p
어쨌건 무엇이건 과장해서 말하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에게는 더 쉬운 일이었다. 처음 형무소에 수감되어서 나에게 가장 괴로웠던 것은, 내가 자유로운 사람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령 바닷가에 가고 싶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솟곤 하는 따위 말이다. 발바닥에 부딪치는 첫 물결, 물속에 몸을 담그는 촉감, 거기서 느끼는 해방감, 그런 것들을 상상할 때면, 갑자기 나는 감옥의 벽이 그 얼마나 답답한가를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그다음에는 죄수로서의 생각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안뜰에서 하는 산책이나 변호사의 방문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이럭저럭 잘 보낼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만약 마른나무둥치 속에 들어가 살게 되어 머리 위 하늘의 표면을 바라보는 것밖에 다른 일이라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차츰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리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면 나는 지나가는 새들이나 마주치는 구름들을 기다렸을 것이다. 마치 여기서 변호사의 야릇한 넥타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듯이, 또 저 바깥세상에서 마리의 육체를 껴안을 것을 기다리며 토요일까지 참고 지내듯이. -97p
그러한 불편들을 제외하면, 나는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았다. 거듭 말하자면, 문제는 다만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을 배운 뒤부터는, 심심해서 괴로운 일은 없었다. 가끔 나는 나의 방을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방의 한구석에 출발해서 한 바퀴 돌고 난 다음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인데, 그러면서 도중에 있는 것을 모두 마음속으로 따져보곤 했다. 처음에는 아주 빨리 끝나버렸다. 그러나 다시 되풀이할 적마다 조금씩 길어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있는 가구를 하나하나씩 기억해 내고, 그 가구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씩 떠올렸고, 또 그 물건마다 그 세부를 골고루 생각하고, 그러한 세부에 있어서도 상감이라든지 갈라진 틈이라든지 이 빠진 가장자리라든지 그런 것들에 관해서, 그 빛깔 또는 결 같은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재산 목록의 졸가리를 파악해서 온전한 일람표를 만들기에 힘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 주일 후에는, 내 방 안에 있는 것들을 열거해 보는 것만으로도 여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처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등한히 했던 것, 잊어버렸던 것들을 기억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바깥세상에서 단 하루만을 살았을 뿐인 사람도 감옥에서 백 년쯤은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마든지 추억할 거리가 있어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건 하나의 장점이었다. -99p
내가 받은 인상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내 눈앞에 전차 좌석이 있고 거기에 앉아있는, 그 이름 모를 승객들이 모두 다 새로 오르는 승객들을 훑어보면서 웃음거리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 배심원이 찾고 있던 것은 웃음거리가 아니라 범죄였으니까. -107p
그러나 물론 언제나 분별 있는 생각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또 어떤 때는 법률의 초안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형법 체제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요점임을 나는 알아차렸다. 천 번에 단 한 번, 그것이면 수많은 일을 해결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나는 수형자가 먹으면 열 번에 아홉 번만 죽는 그런 화학 약품의 배합을 고안해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침착하게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나는 단두대의 칼날을 사용할 경우 결함은 그것이 아무런 기회도, 절대로 아무런 기회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임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수형자의 죽음은 결정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130p
사람이란 아주 불행하게 되는 법은 없는 거라고 엄마는 가끔 말했었다. 하늘이 빛을 띠고 새로운 하루가 나의 감방으로 새어들 때, 형무소 안에서 나는 엄마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발소리가 들려와서 내 심장이 터지고 말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문으로 달려가 판자에 귀를 대고 제정신이 아닌 듯이 기다리노라면, 나중에는 나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가 마치 헐떡이는 개의 숨결과도 같아서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결국 나의 심장은 터지지 않았고, 나는 다시 한번 스물네 시간을 벌게 되는 것이었다. -131p
"아니, 당신 말을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다른 생애를 바란 적이 있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자가 된다든지 헤엄을 빨리 칠 수 있게 된다든지 더 잘생긴 입을 가지게 되는 것을 바라는 것보다 더 중요할 게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것도 그와 같은 종류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의 말을 가로막고 그 다른 생애라는 것을 어떻게 상상하느냐고 묻기에, '지금의 이 생애를 회상할 수 있는 그런 생애'라고 외치고 곧이어서, 이제 그만하라고 말했다. -136p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첫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그 역시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1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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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화'라는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단어인가. 이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고, 그럴듯해 보이고, 나의 몫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며 살아야 했는가. 나의 욕망, 나의 감정, 현재 내가 느끼는 감각, 그 모든 것들은 얼마나 많은 수려한 말들로 덮어져 알맹이를 왜곡하는가. 실체가 있을지 모를지 모르는 사랑, 성공, 평판, 안정을 얻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굴리고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애쓰는가.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은 때로는 무례하고, 때로는 윤리적으로 어긋나 보이기까지 한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오랜 감각은 비슷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타인을 '무정한' 사람이라든지,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분명 그도 기뻐하고, 슬퍼하고, 만족하고, 고찰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지나쳤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일련의 불운들 앞에서도 자신의 삶의 행태나 자세를 바꿔가며 더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굽힐 법한 것을 굽히지 않는 미련함, 타인이 원하는 방식의 답변을 끝까지 하지 않는 답답함, 이 모두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삶의 태도인가. 그러나 그는, 확신한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삶을, 예정된 죽음 앞에서, 후회하지 않고 한탄하지 않고, 확신할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평가한다. 아이고, 이 답답한 사람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