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과 공현서
에디터 : 박서현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한다. 카키색을 즐겨 입고 좀처럼 입을 열지 않지만,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에는 거침없이 답하는 사람. 차분하지만 무겁지 않은, 특유의 분위기를 두르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한발 물러나 바라보는 사람. 인터뷰하는 내내 그의 눈에는 무딘 일상을 비틀어 특별함을 찾아내려는 반항심과 새롭게 발견할 재미에 대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위해 일관성을 내려놓은, 7A반 조소과 공현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미술대학 조소과의 공현서입니다. LnL에서는 7A반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미술을 하게 되셨나요?
어렸을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그냥 미술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되게 어릴 때, 초등학교에 가기 전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유치원에서부터 그림을 그리다가 입시를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중학교 졸업이 가까워졌을 때 어머니가 미술을 하겠냐고 물어서 하겠다고 대답했고, 그때부터 예고를 알아보고 입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특정한 계기가 있어서 미술을 좋아하거나 그림을 그리게 된 건 아니었나 보네요.
저도 생각을 해봤는데, 특정한 계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그림을 그리면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사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그림을 그려봤자 얼마나 잘 그리겠어요. 근데 선생님들이 제가 그림 그리는 걸 보고 잘 그린다고 칭찬해 주니 그게 좋아서 계속 그렸던 것 같아요.
유치원 때부터 잘 그렸나 본데요.
그건 아닌데.. 많이 그렸어요. 그림 그리는 빈도수가 높으니까 선생님들은 이 아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나 보다 싶었을 거예요. 계속 잘 그린다고 얘기해 주니까 기뻐서 더 그리고 했죠.
선천적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과 못 그리는 사람이 나눠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렸을 때 그림을 좋아하고 많이 그리다 보니 연습이 되고 느는 것 같습니다.
그림으로 입시도 하고 대학까지 오게 된 과정이 타고난 재능보다는 많이 그리고 좋아해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맞아요. 사실 운이 좋은 것도 있어요. 어렸을 때 그렇게 많이 자극받을 수 있었던 환경 자체가 운이 좋았죠. 사람은 능력치를 가지고 태어나서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느냐에 따라 나중에 많이 발전할 수도 있고, 어느 정도에서 멈출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술 중에서도 조소를 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회화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수채화를 평면에다 자꾸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답답해 보였습니다. 나름 재미있긴 했지만 평면에 환영을 만든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원래 미술을 하면 수채화와 유화를 하면서 평면에 붓을 들고 그리다가, 조소를 하게 되면 흙과 점토를 만집니다. 처음에는 흉상 정도 형태의 사람 얼굴을 만드는데, 그게 재미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조소를 잘해서 나도 잘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했었는데, 그 영향도 받은 것 같아요.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힘들진 않았나요?
고등학교 입시는 힘들었는데 대학교는 오히려 괜찮았어요. 요구하는 방향성 안에서 이리저리 답을 하는 게 창의적이고 재밌더라고요. 그렇다고 아예 안 힘든 건 아니었지만요.
고등학교 3년은 어땠나요?
아직 인생을 별로 살진 않았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나 싶어요. 좋은 친구들도 여럿 만났고, 어느 정도 머리가 커서 왔으니 다들 자기 생각이 있어서 건설적인 이야기도 하고, 재밌게 놀면서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동안 어려웠던 적은 없었나요?
주로 입시 때문에 힘들었죠.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가 실기를 좀 잘했어요. 반에 30명이 있었는데 매달 줄을 세워서 우수작에 스티커나 메달을 주곤 했거든요. 저는 3월부터 10월까지 3등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어요. 이렇게만 하면 되겠다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수능을 보고 왔는데, 수능이 끝난 후로는 실기를 하루에 12시간씩 해야 했어요. 1월 초가 실기라 그전까지 매일매일 그래야 했는데, 수능이 끝난 다음 날부터 연습하러 가기가 싫더라고요. 친구들이랑 노는 것도 재밌고, 수능 끝나면 좀 더 재밌게 입시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수도 잘 나오지 않고, 악순환을 타서 성적이 많이 내려왔었어요. 그때 큰 위기가 있었는데, 입시에서 늦게 그런 위기가 왔다 보니 더 불안했어요. 실기 한 달 전쯤에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회복을 해서 시험장에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회복했나요?
놀러 다녔어요. 원래 일주일 내내 실기 연습이 있어서 빠질 수 없긴 했는데... 아버지와 저 모두 새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철원에 민간인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코스가 있는데, 둘이 거기 가서 두루미 보고 그랬습니다.
언제부터 새 보는 것을 좋아했나요? 어떻게 탐조를 다니는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동물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새를 보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였어요. 둘 다 원래 그쪽 취미가 있었던 건 아니고 즐길 만한 걸 찾다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새를 보느냐에 따라 다르긴 한데, 가만히 있는 새 종류를 볼 때는 필드스코프 같은 걸 가져가요. 삼각대에 세우고 가만히 초점만 맞춰두면 머물러 있는 새를 볼 수 있어요. 참새처럼 많이 움직이는 새를 보러 갈 때는 쌍안경을 가져가서 봅니다.
또 다른 취미는 무엇이 있나요?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합니다. 특히 밤, 11시 이후 밤 시간대에 나가는 걸 좋아해요. 그쯤에 막차가 있잖아요. 기숙사에 있다가 사부작사부작 나와서 막차를 타고 어디든 가요. 서울 아무 데나. 최근에는 용산역에 많이 갔어요. 용산에 가서 열차 운행할 때까지 그냥 시간을 죽이고 있어요.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하거나, 역 앞 아이파크몰에 앉아서 멍을 때리거나 상영하는 게 있으면 영화를 봐요. 쇼핑몰 안에 많은 상업시설을 둘러보기도 하고요. 대부분 밤에 돌아다니는데, 아이파크몰 안에 문 닫은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합니다. 용산역에 큰 계단이 있는데, 거기 앉아서 건너편 광장과 도로를 바라보며 이따금 지나가는 차를 구경하는 것도 재밌어요.
그 시간대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시간에 나가면 되게 조용해요. 건물 빛이 많지 않고, 사람도 별로 없는 데다 내가 볼 수 있는 가시거리가 줄어들어 이불을 덮고 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안정감이 있달까. 가끔가다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 구경하기도 하고요.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인데, 12시나 3시부터 용산역에 앉아서 해가 뜰 때까지 가만히 있으면서 신호등이 꺼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무런 차도 지나다니지 않는데 빨간불에 안 건너고 파란불에 건너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뭐랄까, 의미 없어진 규율을 지키고 있는 거니까요.
3시에서 5시는 가장 야심한 밤이죠. 제가 종종 라디오를 듣는데 그 시간대는 편성된 라디오가 아무것도 없어요. MBC라디오는 프로그램이 없을 때 노래가 끊이지 않고 나오는데, 2시간 동안 음악만 나오는 때가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입니다. 이때 모든 것들이 다 쉬는 타이밍인 듯한 느낌과, 그 시간에 제가 깨어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져요.
그렇군요. 모두가 쉬는 타이밍이면 본인도 쉬어야 하진 않나요?
안 그래도 여름방학부터 밤을 종종 새다 보니 건강에 문제가 생기더라고요(웃음). 요즘은 좀 자려고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낮에 돌아다닐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잘 보이는, 밤이라는 시간대가 매력적인 것 같아요. 밝고 사람 많을 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가로등이나 신호등이, 새삼 인상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단 말이죠. 그런 걸 관찰하는 게 되게 재미있어요.
표현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게 더 많은 타입인 것 같아요. 살아가는 데 있어서, 또는 짧게 하루하루 사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가요?
즐겁게 사는 거예요. 최소한의 해야 할 것들만 하면 나머지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요. 그 시간에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관성에 대한 추구를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 성격은 논리적 사고, 소위 말하는 ‘T’가 강한 편인데, 취향에 있어서 일관성을 추구한다든지 하며 제 안의 모든 모순을 제거하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모순을 제거하려 하다 보면 자꾸 자기기만적으로 행동하게 되더라고요.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내가 좋아하는 건 이거고 싫어하는 건 이거야’ 같은 생각을 강하게 가지니까, 점점 나를 속이게 되는 거 있죠.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틀을 규정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군요.
그렇죠. 스스로 특정한 인물상을 부여해 버리니까 그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런 일관성을 내려놓고 살아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스스로 마음에 드는, 또는 좋아하지 않는 본인의 모습이 있나요?
딱히 없어요. 자기혐오도, 자기애도 없는 것 같아요. 그게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실 자기혐오와 자기애를 갖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 문제에 대해 한참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제 주변의 사람 중 자존감이 너무 낮아서 자기혐오에 빠져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한테는 그게 꽤 큰 원동력이었어요. 작업에서 소재로 쓰기도 하고, 회의주의로 빠지진 않으면서 혐오를 이어 나가는 걸 보며 ‘저 형태는 뭐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다른 한 친구는 자기애가 너무 강해서 거의 호수에 빠져 죽을 친구였어요. 그런데 오히려 자기 검열이 심했어요. 스스로가 좋아하는 모습만 있도록 만드는 걸 보면서, 진정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좀 했어요. 어떻게 보면 자기혐오와 자기애 모두가 없는 삶이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니, 둘 다 있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더라고요. 계속 고민하다 보니 머리가 아파져서,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관망자의 시선으로 제 삶을 바라보고 싶어 졌어요. 그래서 이젠 자기애도 자기혐오도 끌어안고 살아가려고요.
인터뷰하면서 느낀 것인데, 자기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보려는 성향이 강한 것 같아요.
맞아요. 어렸을 때부터 객관화를 위한 노력을 했어요.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게 자의식 과잉이거든요. 그렇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스스로 객관화하게 되는 것 같아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저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죽어서 유령이 되는 것이 꿈이에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자연사한 후 유령이 되어서 돌아다니고 싶어요.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새벽에 관정 2층이나 미대에 나타나서 괴담도 만들고요(웃음).
자신을 객관화해서 보는 성향이 강하다면,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본인의 모습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가요?
어느 순간까지는 그랬어요. 나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확인하기 위한 행위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중학교 때까지는 그게 심했는데, 어렸을 때 다 포기했어요. ‘내려놓았다’ 보다는 ‘포기했다’는 말이 어울려요. ‘이젠 모르겠다,’ 딱 이런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되고 나니 어떻던가요?
장단점이 있을 텐데, 저는 장점이 훨씬 컸어요. 자기 검열이 줄어들며 덜 피곤해졌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더니 저랑 잘 맞는 사람만 곁에 남았어요. 내 모습을 꾸미지 않으면 진짜 나와 함께할 만한 사람들과 더 가까워진다는 게 큰 장점인 것 같아요. 물론 인간관계를 맺다 보면 최소한의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요. 요즘은 다른 사람이 아닌 저를 위해 객관화를 하고 있어요. 저 스스로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요.
마지막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한 단어를 꼽자면?
저는 현재 저 자신을 설명할 단어는 잘 모르겠고, 앞으로 되고 싶은 건 있어요. 저는 ‘비일관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요. 유령이 되어 떠돌아다니고 싶다는 것, 자기 검열의 문제와도 연관되는데, 스스로의 모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일관성을 내려놓고 싶어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있잖아요. 변화한다는 사실 말고는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게, 말장난 같지만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상황이 나에게 닥쳐도 시점이 다르면 그에 대한 반응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죠. 이 차이를 스스럼없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같은 상황에 대해 나오는 제 반응들이 일관적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비일관적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15년 후에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해요. 근육, 내장, 세포 모두 원자 단위로 소멸하고 새로 생성된대요. 완전히 다른 몸인 거죠. 그렇다면 지금의 나와 15년 후의 나는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전혀 다른데, 어떻게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으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공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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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23학번이자
LNL 7A 반의 구성원.
서울대학교 야생조류연구회에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