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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석진 May 02. 2024

창덕궁 비원에서 아침을 깨우다

2024년 봄 궁중문화축전 (아침 궁을 깨우다) 행사 참여기

2024년 봄 궁중문화 축전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다. 기획된 프로그램 중 '아침 궁을 깨우다'는 선착순으로 참여자를 모집했다. 손이 빠른 딸이 재빠르게 예매를 해줘서 갈 수 있었다. 예약 날짜를 오인해서 하루 전날 가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현지 운영팀장의 배려로 무사히 참가할 수 있었다.

이 행사는 창덕궁의 봄날 풍경을 즐기는 행사로 산책 가이드와 함께 창덕궁 숲길을 걷는 프로그램이다. 산책 가이드는 '궁궐 걷는 법'의 저자인 이시우 작가로 편안한 안내를 해주었다. 그의 해설은 지나치게 깊지도, 길지도 않은, 딱 적당한 분량의 해설이었다. 그래서 산책하는 내내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전각과 후원을 도는 동안 숲과 아름다운 절경을 누리며 앎과 감동이 있는 알찬 두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라 관람객이 없는 호젓한 고궁의 아침을 경험한 것이다. 사진기자와 스태프들이 앞서 갔지만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한적한 분위기였다. 더구나 창덕궁 후원은 쉬 오기 힘든 곳이고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명소인데도 한가하고 여유롭게 세세히 둘러볼 수 있어서 아주 감격스러웠다.

창덕궁은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 건축된 궁궐로 태종 때 지어졌다. 유홍준 교수는 '창덕궁은 땅이 시키는 대로 지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 의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리며 건축했다는 것이다. 1592년 임란 때 화재로 소실되어 그 후 중건되었는데 많은 왕들이 좋아했던 궁궐로 꼽힌다.


궁궐 뜨락에는 봄꽃들이 지고 초록이 가득하다. 물론 지금 피는 꽃도 있다. 초입에 백당나무 꽃이 궁궐의 분위기에 걸맞게 피었다. 화려하지 않은 순백의 꽃의 자태가 우아하다. 금천을 지나며 산책을 시작했다. 나쁜 기운을 막는 금천을 건너는 금천교는 금한다는 금천과 달리 비단금자다. 다리이름에도 격조가 있다. 다리 입구에는 상서로운 동물을 상징하는 조각이 있는 꼬리가 귀엽다.

백당나무 / 서수

금천교를 건너 인정전을 찾아간다. 텅 빈 궁궐 길이 신선하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국가의 공식행사를 치르는 곳이다. 인정전 앞마당에는 품계석이 놓였는데 정조 때 신하들의 자리 정리를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인정전의 금빛 단청은 황제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른 아침의 인정전 내부는 조명빛에 신비한 분위기가 난다. 왕의 시각으로 바라본 궁궐의 모습 속에 인정문 지붕에 새긴 오얏꽃 세 송이가 보인다.

인정전
인정전 내부
왕의 시선으로 바라본 풍경
오얏꽃 세 송이

선정전은 편전으로 일종의 왕의 사무실 공간으로 유일한 청기와 전각이다. 청기와에 햇살에 비치면 무척 아름답다. 희정당은 침전으로 전각 구도가 독특하고 단청이 아름다워 눈길이 간다.

선정전
희정당

세자가 머물던 동궁인 성정각을 지나 낙선재에 들어선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다.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수수한 외양이다. 낙선재 후원의 화계에는 작약이 활짝 피었다. 무늬 벽돌과 기암이 어우러져 매혹적인 풍광이다. 후원은 바깥나들이가 어려운 왕가를 위한 배려의 차원으로 조성되었다. 아름다운 전각인 상량전 앞에는 홍매가 자란다. 이른 봄에 활짝 핀 홍매화는 대단한 장관이다. 꽃이 진 후에도 나무의 자태가 여전히 아름답다. 낙선재의 둥근 방문 모양의 풍경은 낙선재의 가장 아름다운 풍광이다.

낙선재와 상량전


상량전
낙선재 화계
홍매

창덕궁 후원을 비원 혹은 금원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궁궐 중에 창덕궁만이 유일하게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 연유는 창덕궁 후원이 있기 때문이다. 후원은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연경당, 옥류천으로 아쉽게도 옥류천은 공사 중으로 관람을 하지 못했다.

후원 가는 길

울창한 숲길을 지나면 부용지를 만난다. 네모 반듯한 연못과 중앙의 둥근 인공 섬은 천원지방 사상을 담은 것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의미다. 푸른 숲에 둘러 쌓인 연못은 정갈하고 십자형의 부용정과 사정기 비각이 고운 풍취를 빛낸다. 부용정에서 정조가 낚시를 즐겼고 신하들과 주연을 베풀며 시제를 바로 풀지 못하면 인공섬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건너편에는 어수문이 있고 그 후면에는 주합루가 당당히 서 있다. 주합루의 1층이 규장각으로 정조가 만든 왕실 도서관이다. 측면에는 검은색 바탕의 금글씨로 현판을 단 영화당이 있다. 이런 현판은 궁궐에서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을 뜻한다. 현판은 영조의 친필이다. 이 영화당 앞마당이 춘당대로 이곳에서 과거를 치렀는 데, 이틀에 걸쳐 7만여 명이 응시했다고 전해지며 여기서 난장판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부용지
부용정
사정기비각
어수문 과 주합루

불로문을 지나면 애련정이 있는 애련지가 나온다. 연꽃을 유독 좋아했던 숙종 때 만들어졌고 이름도 직접 지었다. 정조의 손자인 효명세자가 공부하는 장소로 지은 의두합과 궁궐 전각 중에 가장 작은 건물인 운경거는 소박한 모습으로 선비의 기품을 풍긴다. 전각 후면에 흰 작약꽃이 활짝 피어서 운치를 더하고 있다.

불로문 /애련지 /애련정
애련정
애련정
애련정
의두합/ 운경거

후원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숨겨놓은 정원이 이어진다. 관람지로 가는 길에 우람한 뽕나무가 서 있다. 아름드리 고목인 뽕나무는 흔하게 볼 수 없다. 왕비가 침잠례를 위해 심은 뽕나무가 세월을 묵은 것으로 천연기념물 471호로 지정되었다.

천연기념물 뽕나무

깊은 숲 속에 위치한 관람지 주변은 절경이었다. 후원 중에 가장 빼어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색 있는 멋진 정자들이 언덕을 따라 배치되었다. 연못도 반듯한 사각형이 아닌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못 중앙의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은 현판도 파초 이파리를 닮았다. 승재정은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는 데 속세를 떠난 깊은 산속의 선경을 연출한다. 이곳에서는 공부보다는 마음 수양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존덕지에 자리 잡은 존덕정은 이층 지붕 구조의 정육각형의 정자로 독특한 외관을 지녔다. 천정은 우물정자로 황룡이 장식되어 화려하다. 현판이 없고 시문을 새겨 누각에 걸어두는 게판이 걸려있다. 게판에는 정조의 친필이 담겨있다. 효명세자가 책을 읽었다는 폄우사도 정갈한 자태로 남아 있다.

관람지 /존덕정 /관람정
승재정
관람정
관람정
관람정 편액
존덕정
팜우사

연경당 사랑채 동쪽의 선향재는 가장 좋은 향기가 책의 향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은 책을 보관하는 서재이고 독서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공부하는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왼쪽 언덕에는 농수정을 지어 휴식처로 사용했다고 하는 데 철쭉이 어우러진 아주 아름다운 전각이다.

선향재
농수정

후원을 돌아 나오는 길에 매자나무 꽃과 쪽동백 꽃을 만났다. 둘 다 꽃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이 곱다. 신록이 가득한 길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파랗게 물든다. 창덕궁 숲은 어디를 돌아봐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800여 년 수령의 향나무가 있다. 궁궐 나무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 나무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은 위엄이 느껴진다. 고목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든다. 궁 입구에도 천연기념물인 회화나무들이 연륜을 자랑하고 있다.

매자나무/쪽동백
천연기념물 향나무
천연기념물 회화나무

오늘 귀한 경험을 했다. 예전에 창덕궁 후원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오늘처럼 여유롭게 찬찬히 돌아보지 못했다. 조용한 아침에 산책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둘러보니 더욱 좋았다. 돌아본 후의 소감은 이것이다. 우리에게 이토록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다. 철철이 다른 비경을 품고 있다고 하니 꼭 다시 찾아오리라. 올해의 봄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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