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캄캄한 새벽에 집을 나섰다. 강릉으로 문화탐방을 가는 길이다. 피곤해도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이 느껴져 좋다.
종합운동장역에서 7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한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나 여유롭게 전철로 향한다. 출출한 마음에 사과 한 알을 씻었다. 걸어가며 사과를 먹다 볼살을 씹었다. 급하게 먹다 그런 것이다. 언제나처럼 오늘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누구 말대로 나는 참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서울출발 풍경
종합운동장역을 나서니 은행나무 단풍이 불빛에 환해 깊은 가을이 물씬 풍긴다. 새벽부터 부지런한 젊은이들이 버스를 기다린다.나는 가끔이지만 매일같이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는 이들을 생각하니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버스를 타고 김밥으로 먹으며 강릉을 향해 떠난다. 책을 읽으며 가고 싶지만 안경을 써도 눈이 침침하다. 전에는 괜찮았는데 눈을 혹사해서 그런 것 같다. 이후로는 눈건강도 신경을 써야겠다.
굴산사지 가는 길
강릉에 도착했다. 다소 쌀쌀하지만 걷기에 좋은 상황이다. 첫 탐방 장소는 강릉 굴산사지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의 절터다. 남은 유적이라야 당간지주와 석불 그리고 승탑이 대부분인 들판이다.
다듬지 않은 커다란 돌기둥 두 개가 들판에 우뚝 서 있다. 이 당간지주는 절 입구에 세워 절의 특성과 성격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크기가 상당해서 절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드러난 터로도 대찰이었음을 입증한다.
남아있는 석불은 마모가 심해서 윤곽만 남았다. 수인을 통해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로 불교의 진리를 부처로 신격화한 것이다.화려한 시절을 뒤로하고덩그러니 빈터만 남아 쓸쓸하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 굴산사지 석불
석불 근처 민가에 가을이 익어간다. 곶감이 처마에 주렁주렁 달렸다. 아침이 왔지만 잠이 덜 깬 해로 여전히 희끄무레한 전원 풍경이 평화롭다. 빈 들판을 거니는 오붓한 이 시간이 참 좋다.
굴산사지의 또 다른 유적을 찾아간다. 굴산사는 석가모니가 설법했던 영취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굴산사의 고승 범일국사는 강릉단오제의 주신이자 산신으로 민간 신앙의 대상이다. 그와 관련되어 탄생 설화가 이곳 학산 마을에 남아있다. 그의 모친이 샘물을 마시고 국사를 잉태했던 샘이 있고 처녀가 아이를 낳아 들에 버리자 학이 보호했다는 전설이다. 그를 모시는 서낭당터에 장대한 소나무가 위엄 있게 서있다. 황당하면서도 이야기 속에 깃들어 전해지는 역사가 흥미롭다.
학산 서낭당터
500년 된 소나무
굴산사지 승탑 앞에는 품위 있게 자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범상치 않은 자태가 연륜을 드러낸다. 수령이 500년이나 되었다. 반세기를 살아도 푸르고 멋진 자태를 뽐내는 나무가 감동이다. 나이가 들어도 추하지 않고 오히려 품위가 단단해지는 그런 삶을 나도 살고 싶다.
굴산사지 승탑
승탑은 이전에는 부도라고 했다. 흔히 고승들의 사리탑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 승탑은 특이하게 탑신 밑에 석관이 묻혀있어 꼭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세밀하고 우아한 아름다운 승탑이다. 탑신이 층마다 조금씩 다른 재질과 결이 보인다. 온전히 고려시대 유물인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허난설헌
굴산사지를 떠나 히난설헌 생가를 찾았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이로 뛰어난 시문을 남겼다. 시대를 지나치게 앞섰던 그녀는 27세에 요절했고 무려 1000여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213편만이 전해진다. 그녀는 결혼생활이 불우했다. 여인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졌지만 보수적인 안동 김 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못난 남편으로 인해 고부간 갈등이 심했다.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오라버니 허봉의 객사와 딸과 아들도 돌림병으로 모두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로 인해 그녀도 무너졌다. 유언으로 한 많은 삶의 자취를 모두 지우고 싶었던 그녀는 자신의 저작을 다 태우기를 원했다. 하지만 허균의 노력으로 시는 남았고 중국에서 발간된 시집은 종이값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그녀의 문학작품의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그녀로서는 불우한 생이었지만 그로 인해 뛰어난 작품이 탄생했고후세 사람들에게감동을 준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다.
강문 진또배기
강릉 해변을 찾아가는 길에 솟대 공원을 만났다. 강문 진또배기로 알려진 이곳의 솟대는 특이하게 세 마리의 오리가 장대 끝에 앉아있다. 바람, 물, 불의 삼재를 막아주는 의미를 지녔다. 민간 신앙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강문 해변
강문 해변이다. 넓고 푸른 바다는 언제나 보아도 좋다. 맑은 물이 찰랑대는 동해바다는 더욱 그렇다. 깨끗한 백사장의 굵은 모래를 밟는 기분도 덩달아 좋다. 한가한 해변에 여유가 묻어난다. 빨간 등대가 선명한 바다 풍경이 마음에 쏙 들어온다. 잔잔한 바다 위에 갈매기가 노닌다.
강릉해변에는 송림이 길게 늘어 늘어져있다. 2킬로 미터가 훌쩍 넘는 거리다. 송림의 시초는 고려 충숙왕의 사위인 최문한이 강릉에 정착하면서 8그루의 소나무를 심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름다운 소나무 숲은 사람들에게 정서적으로 필요를 채워줄 뿐 아니라 방풍림으로서 역할로 백사장을 보호하는 역할도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 피톤치드가 왕성하게 풍기는 숲길을 거닌다. 청설모와 까치도 함께 걷는 길이다. 몸의 건강이 쑥쑥 증진되는 기분이다. 조각 공원도 있어서 심심하지 않다.
한참을 걸어 안목 해변에 다다랐다. 해변 걷기의 종착지다. 시간의 여유가 있었으면 바닷가 벤치에 앉아 망중한을 충분히 즐겼으면 좋으련만 마음뿐이다. 더구나 안목해변은 커피거리로 유명한 곳인데도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할 틈도 없다.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쉬움은 컸지만 오가며 바다를 눈에 담은 것으로 마음을 달랜다.
안목해변
마지막으로 오죽헌을 찾았다. 신사임당과 이율곡의 자취가 담긴 곳이다. 오죽헌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보존과 단장이 잘 되었다는 점이다. 주변 환경도 잘 가꾸었고 전시관이나 한옥 건물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초기의 한옥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귀한 유물이다. 600여 년을 살아온 율곡매와 배롱나무도 오죽헌의 격을 높이는 요소다. 자연과 역사와 유물이 고루고루 잘 보존된 곳이다. 한 인물을 기리는 기념관의 규모가 아마도 한국에서 제일이 아닌가 싶다.
오죽헌 전경
이이/신사임당
잘 알려진 대로 신사임당은 한국인들의 어머니의 표상이다. 정치적인 고려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걸세출의 훌륭한 자녀들을 두었으니 반론하기도 어렵다. 아울러 자신도 여인으로서 시화에 능했으니 할 말이 없다.
오죽헌
율곡매/600년 배롱나무
신사임당 친필
신사임당 초충도
이매창 묵매도
신사임당이 초충도로 알려진 대단한 화가지만 딸인 이매창의 그림도 놀랍다. 부족한 식견으로 보기에 매창의 그림이 더 나은 것 같다. 묘사의 정확성과 회화로서 깊이가 매창의 작품에서 더 도드라지는 느낌이다. 자녀들이 모두 다 뛰어난 인재들이라는 사실이 정말 놀랍다.
율곡이 8살에 쓴 한시 화석정
조선의 천재로 알려진 이율곡은 장원급제를 9번이나 했다. 그가 8살에 지은 한시가 그의 천재성을 말해준다.
그의 고향인 파주 화석정에 올라 지은 시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은 끝없이 일어나네
멀리 보이는 저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을 받아 붉구나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었네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이미 기성시인의 경지를 뛰어넘는 시가 아닌가! 8살이 지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10살에 지었다는 경포대부에는 인생을 달관한 삶에 고뇌하는 모습을 그렸다니 하늘이 내린 천재임이 분명하다. 그는 조선의 대유학자로서 이론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한 정치인이다. 아쉽게도 서얼철폐와 같은 개혁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늘이 천재를 우리에게 내렸지만 어리석은 세대가 그 선물을 발로 걷어차버린 셈이다.
율곡 이이 영정 / 이이 가 쓰던 벼루
강릉은 여러모로 감동이 있는 곳이다. 역사가 숨 쉬고 자연이 살아있다. 아울러 품고 있는 보물들을 담는 그릇도 잘 준비되어 있다. 하루 역사 탐방으로 더할 나위 없는 곳이 분명하다. 값진 하루가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