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카페에서 누나를 만났다. 테이블 위에는 묵직한 머그잔이 놓여 있었다. 그 잔의 따뜻함은 손끝에 조용히 스며들었고, 창밖으로 흐르던 음악은 별다른 의미도 없이 공기 속에 녹아들었다.
우리는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은 그런 대화들을 의미 없는 잡담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런 시간들이 가장 오래 남는다. 특별할 것 없으니까 오히려 오래 남는다.
그러던 중, 별것 아닌 농담 하나가 시작됐다. 같은 부서 선배가 장난처럼 말했다. “돈 좀 줘.” 누나는 그걸 듣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나도 줘.”
그 순간, 별생각도 없이 100만 원을 보냈다. 너무 자연스럽게.
그러고 나서,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 내 전부를 줘도 괜찮겠다는 생각.
이런 감정은 설명하기 어렵다. 이유를 따져보면 어쩐지 더 엉켜버리는 감정. 가끔 사람의 마음은 논리나 상식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서 작동한다. 마치 오래된 턴테이블 바늘이 예기치 않게 튀어버리는 것처럼.
이런 순간, 나는 종종 즐겨읽던 하루키의 한 문장을 떠올린다.
“세상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대부분의 중요한 것들이 그렇다.”
나는 왜 누나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걸까? 그냥. 그렇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그냥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 것인지 깨닫는 순간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 관계를 소유와 존재의 차이로 나눴다. 우리는 종종 사람을 이해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단순히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내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누나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누나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다. 이유 없이. 마치 그 존재 자체가 내 안의 가장 깊은 무언가를 자극하는 것처럼.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컷는 “충분히 좋은 어머니”라는 개념을 말했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때로는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누나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완벽하지 않아도,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내가 서툰 농담을 던져도 웃어주고, 특별한 이유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어린 시절, 그 당연했던 안정감이 어쩌면 지금도 내 안에 깊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감정의 핵심에는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성에 대한 책임감이 자리한다. 그는 타인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그 존재 자체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이유나 계산은 필요 없다. 그저 그 사람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누나에게 느끼는 이 감정도 비슷하다.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심지어 장난처럼 주어도 괜찮다고 느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감정의 뿌리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100만 원이라는 숫자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돈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숫자일 뿐이고, 숫자는 언제나 추상적이다. 더 중요한 건 그 순간의 무게였다.
사람은 가끔, 너무 가벼운 순간에서 무거운 의미를 발견한다. 마치 가볍게 던진 돌이 예상치 못한 깊이로 가라앉는 것처럼. 내가 보낸 100만 원이 그런 순간이었다.
그 순간은 장난처럼 시작됐지만, 그 안에는 이상하게 깊고 무거운 감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설명되지 않는다.
오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모든 걸 줘도 괜찮은 사람. 이상한가? 아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늘 이상한 방식으로 우리를 흔든다.
중요한 건, 이 감정이 나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에서 그런 순간들을 만나기 위해 살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오늘 아무 일도 없는 하루 속에서, 나는 그 조용한 진실과 마주했다.
그리고 그게 꽤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