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5일
누나가 아팠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뭔가 뚜렷한 감정이 들었던 건 아니다. 슬픔이나 걱정, 그런 명확한 감정이라기보다는, 그냥 잠시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손끝이 묘하게 공허해지고, 마음 어딘가에서 작은 균열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주 조용히, 별안간.
나는 오설록 차 한 상자를 건넸다. 따뜻한 차가 무언가를 해결해 줄 거라는 기대 같은 건 없었다. 아니, 사실 그런 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다. 마치 손을 뻗으면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만 같고, 적절한 말을 하면 아픔이 조금은 가벼워질 것만 같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무겁고, 또 단순하다.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정말,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묘하게도 내 안에서 아주 낯선 감정들을 불러온다.
수전 손택이 질병은 은유가 아니다에서 썼던 말이 떠올랐다. 병이라는 것은 단지 몸의 문제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도 어딘가에 갇히게 만든다고. 물론, 내가 느낀 건 책에서 말하는 그런 무거운 철학적 의미는 아니었겠지만, 그 문장에는 이상하게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무게가 있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 느낄 수도, 덜어낼 수도 없다는 것. 그 사실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아픈 사람은 스스로의 고통을 견뎌야 하고, 그 곁에 있는 사람은 무력한 자신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그 무력감이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건, 결국 내 감정과 직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한계.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없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 나는 작아지고, 동시에 아주 조용해진다. 말을 해야 할까? “쾌차하세요”라고 말하는 건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그런 말들은 이상할 정도로 얇고 공허하다.
그래서 나는 차를 건넸다.
차를 마신다고 해서 통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 순간 나 자신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단순하고도 무의미해 보이지만, 적어도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는 표현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플 때, 우리는 왜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할까?
그건 어쩌면, 좋아한다는 감정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낸 착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좋아한다는 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을 거라는 기이한 믿음을 심어준다. 내가 뭔가를 하면, 조금은 괜찮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무력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색한 농담을 던지고, 차를 내밀고, 짧은 메시지를 보낸다. 별거 아닌 것들이지만,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그 순간 우리를 붙잡아 주는지도 모른다.
차 한 잔이 전부일 수는 없다. 하지만, 가끔은 전부가 아닌 것들로도 충분히 위로를 전할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사실은, 단순히 슬픈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딘가에서 나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과 마주하는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과 마주하고, 그 무력함을 견뎌야 한다는 것.
그런 순간에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정말 그저 곁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차를 건네고 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조용했다. 아픔이 사라진 것도, 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는 이상한 위안이 남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플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차를 건넸다. 그 사람이 나아지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의 곁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어쩌면 그 순간에 가장 필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