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 Nov 08. 2020

당신의 데미안이 되고 싶습니다.

나의 시선으로 다른 이의 특별함을 알아볼 수 있는.

뜬금없이 데미안이라니 싶을 수도 있다. 역으로 나에게도 그랬다. '데미안'이라는 단어는 머리 한 켠에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저장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헤르만 헤세'라는 단어도 따라왔다. 그러나, 늘 거기까지였다. 누군가 '데미안 읽어 봤어?' 라고 묻는다면 '흠... 알긴 알지. 헤르만 헤세 책이잖아'라 대답하는 딱 거기까지. 


이제 정말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물었을 때 적어도 저것보다 더 길게 대답하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데미안과 1주일 보냈다. 아침 출근 경의중앙선 안에서 데미안을 들고 햇살과 함께 한장 한장 넘겨갔다. 그리고 책을 덥고 난 지금. 누군가 데미안에 대해 묻는다면, 그건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으리라하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이 그렇게 적절한 표현인진 모르겠지만, 실제로 볼 수 없는 데미안의 형체는 이미 마음 속에 충분히 그려졌다. 지난 1주일간 나는 싱클레어가 되어,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데미안의 행동, 말, 생각은 아름답게 느껴지기 나에겐 충분했다.그리고 내가 다른 누군가에겐 데미안이 되길 꿈꿨다. 


데미안을 적는 헤르만 헤세의 문장도 되새김하곤 했다. 문학책으로 분류되는 도서를 너무 오랜만에 읽어서인가, 문장 하나하나 곱씹는 재미가 있었다. 글을 읽는 내내 그렇게 딱딱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물렁하지도 않는 푹신하지만 불안하지 않은 바닥을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그 문장을 중심으로 데미안을 블로그에 담아두고자 한다. 


'..원래 모습인 우월함에 대한 표창으로 설명하지 않고, 반대로 설명한 거야. 사람들은 말했지, 이 표적을 가진 녀석들은 무시무시하다고, 또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도 했어. 용기와 나름의 개성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한테 늘 몹시 무시무시하거든..' 


카인의 표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카인은 동생은 아벨을 죽여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다. 그리고 그 벌로 평생 다른 사람들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표식으로 남긴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조금 더 찾아보니, 표식의 해석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는 모양이다.  


벌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함으로서, 스스로 평생 살인자라는 멍에를 쓰고 고통스러워하는 벌이라는 설과 오히려 죄인조차도 사랑하는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보기도 한다.  


데미안에서 근원적 표적의 의미는 전자의 부정적인 의식이 강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표적을 보며 손가락질 하고, 혹은 두려워까지 했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 표적을 후자의 개념과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특별함으로 본다. 내가 느끼기에 표적은 그 사람이 가진 특별함을 의미하는 것 같다. 바람에 쉽게 흩날리는 들풀과 달리 바람에 거슬러 올라가는 의지와 같다 느껴진다. 남들이 옳다할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강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를 불편해하고 배척하기도 한다. 


데미안은 세상을 바라볼 때, 스스로의 가치를 잃지 않고 내면의 시야에서 외부를 바라보길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싱클레어가 가족이란 세계에서 가족 밖의 세계로 나아갈 때 데미안은 그가 외부의 세계에서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의 세계의 연장선이 되길 바란다는 인상을 받았다. 


데미안이 바라보는 표적을 기준으로, 우리 사회를 보자면 나는 주변에 도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공을 위한 로드맵을 걷지 않는 자신만의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표적을 가진자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가치에 집중하며 현실이 제시하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간다.  


표적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넓어질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표적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세상에 소개하고 싶단 생각을 해본다. 당신의 표적이 더욱 특별해질 수 있도록. 


'누구나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인생의 분기점이다. 자기 삶의 요구가 가장 혹심하게 주변 세계와 갈등에 빠지는 점, 앞을 향하는 길이 가장 혹독하게 투쟁으로 쟁취되어야 하는 점이다.(중략)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운명인 이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다. 삶에서 오로지 한 번, 유년이 삭아가며 서서히 와해될 때, 우리의 사랑을 얻었던 모든 것이 우리를 떠나가려고 하고 우리가 갑자기 고독과 우주의 치명적인 추위에 에어싸여 있음을 느낄 때 경험하는 것이다. ' 


삶이 투쟁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대학생활 막바지 취업 준비를 할 때 느낀 감정이다. 평범함의 기준점이 너무나 올라가 있는 오늘 날 인생의 분기점은 더 빠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부족함 없이 지낸다고 느꼈으나 어느 순간 나의 평범함이 가진 한계가 보일 때 삶은 투쟁이 된다. 


평범함으로는 살아가기 힘들구나, 평범함을 넘어 특별함으로 가야 내가 살아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었다. 이미, 특별함을 가진 사람들과 격차가 무섭게 느껴졌지면서도 평범한 속에서 특별함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나도 언젠가 특별함으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 특별함을 향한 열정은 너무나 가볍게 무너졌다. 죽음이라는 문 앞에 서서 공포가 다가올 때, 특별함을 향한 여정이 부질없게 느껴졌으며, 특별함 만드는 방법은 외부의 시선으로 날 특별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내면의 시선으로 세상을 특별하게 보는 것이 진정한 특별함이라 느껴졌다. 


삶이라는 단 한번의 기회를 타인의 특별함을 따라가기 위해, 혹은 특별함을 인정받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까운 시간인가에 대한 고찰이었다. 물론, 그 생각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른 방법을 찾은 것뿐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드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가장 많이 알려진 문장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모두 투쟁하며 살아간다. 투쟁이라는 말이 거창하다면, 도전 혹은 시도 정도로만 봐도 좋은 문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든, 나아감은 곧 다른 존재로 바뀌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나는 압락사스라는 신. 그는 우리의 투쟁 과정에서 겪는 도덕적 혹은 규범적 가치를 넘나드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내가 하는 행동이 목적 달성을 위해 정당했는 지, 이 질문이 너무 거창하다면 가깝게는 사람과 사람의 일 속에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수하는 모습은 없었는 지와 같은 이런 사소한 문제까지 들어갈 수 있다. 압락사스는 이런 투쟁 속 선과 악의 경계에서 우리는 모두 뜻하는 존재일 것으로 생각한다. 


'데미안은 당시에 말했었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존경하는 신 하나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는 함부로 갈라놓은 세계의 절반만 나타낸다고(그것은 공식적이고, 허용된 <환한> 세계였다). 그러나 세계 전체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악마이기도 한 신 하나를 갖든가. 아니면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에 대한 예배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압락사스는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신이었다.' 


압락사스가 곧 우리라고 생각해보자. 나는 내 스스로를 가장 존경하며 의지해야한다. 내 스스로가 바로 서지 않으면, 결국 우린 표적을 잃고 다른 사람에 의한 나로 평가 받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이 늘 선일까도 의심하게 된다. 내가 행한 지난 모든 과거가 모두 선이었다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적 존재이외엔 없을 것이다. 


'무서워하지 말게! 그것들은 자네가 지닌 최상의 것이야. 나를 믿어도 되네. 나는 꿈을 많이 잃어버렸어. 자네 나이에 사랑의 꿈들을 능욕했지. 그래서는 안되는 데, 압락사스를 알면,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돼. 아무것도 무서워해선 안 되고, 영혼이 우리들 마음 속에서 소망하는 그 무엇도 금지되었다고 해서는 안 되지' 


압락사스는 어찌보면 우리에게 면죄부일 수도 있다. 나의 꿈을 향한 나의 생각 그리고 실제로 옮긴 행동은 내 소망과 의지에 기반한 행동일 것이다. 물론, 내 개인의 행동이 상대의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거나 손해를 입힌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행동이 타인을 고려한 자기가 선택한 최선의 선인 행동만 행한다면, 내 꿈의 여행은 어디로 가게될 지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우린 신을 만들고 신들과 싸우지. 그러면 신들이 우리를 축복해'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가장 어이없어 하는 부분이 아닐까. 그 들은 우리에게 서로를 사랑하라 가르치려 했지만, 종종 신의 이름을 빌려 여러 별명을 만들고 상대를 옥죄는 게 활용한다. 


'연대란... 멋진 일이지. 그러나 지금 도처에 만발에 있는 것은 전혀 연대가 아니야. 진정한 연대는, 개개인들이 서로를 앎으로써 새롭게 생성될 것이고, 한 동안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놓을거야. 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짓기일뿐이야. 사람들이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서로에 대한 이해없이, 타 집단과 내 집단의 이익 구분을 위해 우리 집단의 승리를 위한 연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연대는 공동의 목적, 공동의 생각, 공동의 행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공동의 목적 의식이 공유되지 못한 연대는 금방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마련이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사랑이 쉽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함께 걷고, 웃으며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싶은 욕망은 사람을 움직이고 도전하게 하는 행동 동기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애가 어려운 이유는 그 정도가 서로 다른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만 상대방과 걷고 싶다고 해서 강제로 함께 걸을 수 없으며, 나의 즐거움이 상대방에겐 무감각한 감정일 수도 있다. 


불만족스러운 감정의 등가 교환 속에서 한 쪽은 사랑을 간청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내 사랑이 이 만큼인데 혹은 난 이 만큼 너에게 사랑을 주고 싶은데, 너는 왜 다 가져가질 않아? 왜 넌 나에게 이 만큼씩 주지 않아? 와 같은 되물음과 함께 고통만 깊어진다. 


간청하지 않고, 쟁취하는 사랑이라.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참 어려운 문장이다. 




내가 만약 이 책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어서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쯤. 그리도 또 다시 지금 다시 이 책을 읽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아마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땐 아무런 생각없이 이런 책이 있네라고 빠르게 읽고 지나갔을 것이고.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쯤은 새가 알을 깨고 세계로 나아가는 투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읽었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쯤 이렇게 한번 더 책을 읽었다면,


과거에 읽은 구절이 그런 의미였구나 하며 책 전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며 빠져들었을 것이다. 


처음엔 싱클레어의 입장에서 데미안을 만나다가, 점점 더 내 스스로가 데미안이 되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문득, 마치 널 기다리고 있었단 듯이 싱클레어에게 등장하는 데미안. 그리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상대를 다시 똑바로 서있도록 도와주는 데미안.  


어느 누군가에겐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데미안. 전쟁터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상대를 구해줄 수 있는 그런 데미안이 되고 싶다.


나의 존재가 상대방에게 길잡이가 된다면, 가장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읽은 책 - 데미안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민음사




매거진의 이전글 일본 장수 기업이 현대를 살아 가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