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꺼주세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예민함

by 오뚝이

나는 겨울생이라 그런지 몰라도 더위를 심하게 타는 체질이다. 여름이 되면 땀이 비오듯 나고 기력이 허해지고 잠도 잘 못자고 입맛도 떨어진다.


여름이 되면 학원은 에어컨 전쟁이 시작된다.

누구는 덥다고 하고, 누구는 춥다고 하고. 모두에게 딱 맞는 에어컨 온도를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학원 차원에서 폭염일 경우 낮 시간 동안에는 아주 강하게 틀고 아침 저녁으로 조절하는 식으로 온도를 맞춘다. 에어컨을 아무리 세게 틀어도 학생 수가 많고, 공부에 집중하다 보면 열이 받아서(?) 점점 더 더워진다. 그래서 많은 학생이 책상에 개인용 선풍기를 놓고 쓰고 있고, 더위에 취약한 나 역시 책상에 작은 선풍기를 놓고 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뒷자리 학생이 갑자기 쪽지와 새콤달콤을 줬다. 그래도 한 세 달 간 앞뒤로 앉으며 나름 내적 친밀감이 생성된 상태였는데 날도 더운데 열공하라는 의미로 준건가? 싶어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쪽지와 새콤달콤을 받았다. 그런데 웬걸.. 쪽지를 펴보니 '더위 식으시면 선풍기 꺼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여있는게 아니겠는가..삼복 더위에 선풍기를 꺼달라니...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선풍기를 쓰기 시작한 날 뒷자리로 바람이 많이 갈까봐서 혹시 몰라 뒷자리 학생에게 선풍기 바람이 가면 언제든 편하게 말해달라고 쪽지에 적어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선풍기 바람이 너무 많이 와서 공부하는데 불편하니 선풍기 바람을 조절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아예 선풍기를 꺼달라니..


웃기는 일이지만 이게 내 멘탈을 무너뜨렸다..

하.. 선풍기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다니.. 서럽기도하고 뒷자리 학생의 이기심에 치가 떨렸다. 그래서 더위 많이 타는 체질이기도 하고 내 자리에 에어컨 바람이 안와서 선풍기를 아예 끌 수는 없다고, 바람 안가게 주의하겠다고 쪽지에 적어서 주었다. 그 이후로 뒷자리 학생으로부터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혹여나 선풍기 바람이 갈까봐서 선풍기를 여기다 놨다 저기다 놨다 하면서 선풍기를 쓸때마다 여간 스트레스 받는게 아니었다.


다른 애들은 잘만 놓고 쓰는데 왜 나는 이렇게 눈치를 보며 써야하나, 항상 1단으로 놓고 혹시라도 소음이 날까봐서 선풍기 아래에 항상 뭘 받쳐놓고 쓰는데, 더워 죽겠는데 선풍기를 아예 꺼달라니 제정신인가, 소시오패스인가, 사회성 제로인가부터 시작해서 온갖 악감정이 피어올라왔다.. 결국 멘탈이 터져서 그 주는 집에서 공부를 했다..


학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학원생활에 익숙해지는 7~8월 즈음해서 소위 '빌런'이란 사람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내가 직접 겪은 일들은 많지 않으나 들려온 이야기들에 의하면 블루투스로 조절할 수 있는 에어컨 리모컨을 들고 다니면서 마음대로 에어컨을 조절하는 학생, 시험지를 뭉태기로 가져가서 다른 학생이 시험을 보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발생시키는 학생, 교실 안에서 연필깎이로 계속 연필을 깎아서 소음을 유발하는 학생, 펜을 책상위에 내다 던지는 학생, 애정문제로 다투는 학생 등등...... 수없이 많다.


공부를 하다보면 예민해진다. 특히 변호사시험은 5번의 기회만 주어지기 때문에 더욱더 날이 서있다. 학원에서는 매일 시험을 보고 성적과 등수가 게시되어 알고 싶지 않아도 내 위치를 매일매일 확인받게 된다.


매일 불안하고, 매일 긴장되고, 매일 숨이 막혀온다. 이런 긴장감 속에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예민해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예민해지면 타인을 위한 공간이 사라지게 된다. 마음의 여유는 없어지고 내 거 챙기기에 급급해진다. 내거라도 잘 챙기면 다행인 순간들이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텐데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은 일들이 이곳에서는 일상이다.


여기서 주변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과 내가 해야 할 공부만을 바라보고 달려야 하는 것이다. 나같이 주변 환경에 영향을 잘 받고,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고, 내 감정에도 민감한 사람이 참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4년 째 살아남고 있다.

로스쿨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적당히 감성적인 사람이었는데 로스쿨에 들어가니 나를 보고 극F라고 했다. 로스쿨 생활을 보내고 고시촌에서 생활하며 내 엠비티아이는 T로 바꼈다. 어쩌면 나는 T가 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T 라기 보다 T 호소인에 가까운 F 인간인 나라는 인간.


몇 주 전, 같은 로스쿨 동기언니와 이야기를 하다가 '기질'에 대해 얘기하며 왜 우리는 타인, 주변 환경에 둔감한 기질을 갖고 태어나지 못했는가 자책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공부를 오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자조했다.


한 헌법재판소 대법관은 사법고시 2차 시험을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큰 일을 겪었음에도 사법고시에 수석합격하였다. 그 사람은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강인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이렇게 무너지고 멘탈이 터지는데 말이다. 매일 무너지고 매일 다시 일어선다. 일어선다에 방점을 찍고 앞만 보고 달리려 하다가도 더위탓인지 내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결국. 이 지독한 더위가, 이 지독한 여름이 잘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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