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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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뚝이


오랜만에 서울에 나갔다.

수녀님과 점심을 먹었다.

걷기 좋은 날씨였다.


다니던 대학교에 갔다.

각종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회계사, 세무사, 변리사, 외교관…


내가 스무 살 때부터 보아온 신부님들을 만났다.

레몬차를 마셨다.

신부님들은 말했다.

“너는 술도 잘 마시고 담배도 잘 피우니까 얼마나 대단해. “ (이제는 둘 다 안 함…)

“네… 껄껄껄.”

그 누구도 ‘잘될 거야.’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오랜만에 많이 웃었다.


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아주 유명한 작가와 친구가 됐다고 한다.

이른바 ‘성덕’이 된 것이다.

친구는 작년에 많이 아팠었는데 열렬한 팬이었던 작가와 친구가 되는 기쁜 일도 겪으며 다이내믹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 작가가 자신에게 선물을 했는데 그 선물을 가보로 대대손손 물려주겠다는 말을 하는 친구의 눈이 반짝였다.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몇 년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어서 내심 부러웠다.


친구에게 말했다.

“사는 게 재미가 없다. 무의 상태야.

기쁨도, 슬픔도 안 느껴져. “

친구는 말했다.

“고기능 우울증인 거 같아. 일상생활이랑 해야 할 일은 다 하는데 우울증인 거 있잖아. “

내가 말했다.

“(고기능 우울증이란 말은 처음 들어봄) 이미 우울증 약 먹고 있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원래 좋으면 미치게 좋아하고 싫으면 미치게 싫어하던 사람이었잖아. 이젠 그런 게 없어. 그리고 생각해 봐라. 몇 년을 ‘내 공부를 방해해 봐. 그럼 나는 네놈을 죽일 테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고. 미칠 수밖에 없지. “


누군가를 만나면 잘 웃고 떠들지만 사람들과 헤어지고 혼자가 되면 마음이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듯한 기분, 집에 돌아오면 번아웃돼서 침대에 쓰러지기.

사람을 만나고 나면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더 말짱해져서 잠이 안 온다. 대화의 잔상이 계속 남는다. 분명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엔 그 누구보다 생명력이 넘치지만 실상은 그동안 공부를 한 게 용할 정도다. 나는 얼마나 그동안 나 자신을 쥐어짜고 또 쥐어짜온 걸까. 내 안에 남아있는 건 뭘까. 우울증이 얼마나 나를 갉아먹고 있는 건지 짐작이 안 간다. 정신과를 바꿔야겠다.


친구는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남편이 하는 북카페에서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일해보는 거 어때.”

“내가 할 수 있을까..? 난 아직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은데…”


(중략)


친구가 말했다.

“사는 게 점점 팍팍해진다…”

“그러게…”

일하랴 육아하랴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친구에게 힘이 되는 것은 책과 글쓰기인 거 같았다.


친구가 시집 한 권을 빌려줬다.

국문과를 나와서 계속 글만 쓰다가 이번에 김수영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동문(친구의 친구)의 시집이었다. 나하늘의 ‘회신 지연’.


“이게 너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시험이 끝난 후 정말이지 난독증 수준으로 글이 안 읽히는데(집중력 제로) 한 번 진득하게 읽어봐야겠다.

친구의 친구의 등단이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은 항상 무언가가 된 이후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무언가가 되기 전에는 누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겠지. 무언가가 되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버티고 난 이후에 결국 무언가가 된 사람의 그 무언가를 부러워하는 것. 이게 그동안 내가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신부님에게 말했다.

“사는 게 재미가 없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어요.”

신부님이 말했다.

“그건 네가 아파서 그런 거야. 너무 오래 아파서. 네가 이상한 게 아니고. 너의 성격이 원래 그래서 그런 것도 아니고. 지금은 들리지 않겠지만 지금보다 나아질 너를 생각하면서 운동을 열심히 해봐. 지금보다 나아질 날이 반드시 올 거야. “


결론은 운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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