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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나씨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눈누난나 눈누난나

by 오스나씨

분명 입사했을땐 20대였던 것 같은데 어느덧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고 다시 또 바뀌려는 조짐이 보이는 이 때, 큰 결심을 해본다. 누누히 회사의 노예로만 지냈다며 여기저기에 불만을 토로하고 다녔었는데 생각해보니 그 와중에 여기저기 많이도 누비고 다니긴 했더라. 그러면서 생긴 이야기거리들을 한번 풀어놓고 싶어져서 하게 된 큰 결심. 조금이라도 기억이 더 남아있을때 남기고 싶다는 욕심.

본인은 어릴적부터 그랬다. 역사학자라는 개념이 없던 어릴적부터 위인전과 어린이용 백과사전 역사편을 끼고 살았다. 중딩시절 잠시 예언서에 심취했던 일부를 제외하면 꽤 오랜시간 역사서에 파묻혀 살았다. 나우누리 역사동호회에서 유일한 중고딩 회원으로 이쁨받고 살았던 지난날이 그립고, 대학교때는 현실과 타협하여 선택한 경영학부생으로서 전공인 통계학 C-받을때 '실크로드와 동서문화의 교류' 교양 강의는 당당히 A+를 받아서 행복했던 사람. 그러면서 아주아주 나중에 나이먹고 나서 돈도 있고 시간도 있는 은퇴 이후에는 중국 서안에서 시작하는 실크로드를 따라 최종 목적지인 사마르칸드까지 과거 대상들이 걸었던 그 길을 나도 한번 찾아가보겠노라고. 로마는 너무 서양스러워서 실크로드스럽지 않을 것이라고. 동서양이 합류하는 지점은 내 마음속에서만은 사마르칸드라고 굳게 정해버렸던 그때.

이후 대소사들을 겪으며 무사히 평범한 직딩으로 안착해 적응모드를 달리고 있던 2010년의 출근길. 왜 나는 은퇴 이후를 기다리고 있는가? 왜 지금 가면 안되는 것인가?에 대해 아주 잠시간 고민하다 코 앞에 닥친 휴가일정에 맞춰 무언가 알아볼 시간도 없고 어떻게 알아보는지도 몰랐던터라 국적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정가로 항공권을 결제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홀로 서게 된 여행.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계획도 없고 대책도 없던 철없던 여인네. 당시 걸핏하면 폭탄 뽕뽕터지던 중국 신장의 어느 지역에서 만났던 어떤 한국인은 나에게 이렇게 겁없는 아이는 처음 보았다고 개탄을 금치못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처럼 유심이 가져다주는 프리한 데이터 생활과 구글지도 도우미 찬스를 쓰지 못하던 그 시절. 2010년 중국 란저우 공항, 시티에서 2시간여 떨어져있는데 현금도 바닥, 국제현금카드를 받아주는 ATM도 없어 시티 복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귀국편을 놓쳐 국제미아가 될뻔했던, 등에 땀나는 마무리 이후 자신감을 듬뿍 충전했던 나는 매년 비교적 장기간(그래봤자 5일, 주말 끼워서 9박10일)의 휴가기회를 노렸다. 그러면서 한 손에는 항상 들러있었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리스트. 애초에 야경과 쇼핑으로 대변되는 시티라이프에는 관심이 없던 나에게 그것은 여행지를 선정하는 좋은 지침서가 되어주었다. 뽀너스로 비록 석사니 박사니 하는 수준의 깊은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무늬는 아마추어 역사학도였던 내게 의미를 가져다 주는 무언가까지도.

그리고 또 하나의 지침서는 바로 일본의 KOEI사가 1995년에 출시한 도스(DOS) 기반 게임인 '대항해시대2' 되시겠다. 고딩시절 요 게임 덕분에 차마 부끄러워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대충 뭐 도시가스 배관을 타고 전산실을 탈출한 여고생의 전설로 남게 된 그렇고 그런 이야기. 키보드 조작을 통해 도착했던 세계각지의 항구들과 탐험을 통해 발견한 여러 유물들. 그것들을 실제 내 발로 밟아보는 것, 실제 내 눈에 담아보는 것이 여고생 오스나의 꿈이었다.

어떤 것을 제일 먼저 적어야 하나, 시간 순서대로 훑는것이 좋을까, 권역별로 훑는것이 좋을까,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부터 적을까, 제일 좋았던 곳을 적는 것이 좋을까 하다가 선택한 것이 그리스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다녀오기도 했고 그래서 정보도 넘쳐나서 나의 글과 비교가 될테지만 감히 건들어 보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다른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1호가 그리스 아테네에 있으니까. 그리고 대항해시대2를 시작하는 생초보들은 어떤 주인공의 어떤 스토리를 고르던지간에 무조건 아테네에 가야했기 때문에. 그 이유는 해본 사람은 압니다.

참고로 저는 흔히 남들이 얘기하는 여행고수가 아닙니다. 최저가의 항공권과 호텔 선택은 기본이고 온갖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동선과 방법들을 동원하여 여행효과를 극대화하고 뿌듯해하며 돌아오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잔머리를 굴리다 삽질하는 것은 기본, 분명 지도를 보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느순간 보니 아니 이 GPS가 고장났나 반대편에 가 있기도 하는 사람이고요, 사기도 잘 당하고 부당한 일을 겪어도 항의하기보다는 무서워서 그냥 숨죽이고 있는 사람이고요. 외국어는 생활기본영어 조금, 중국어 몇 단어 할 줄 압니다. 그런다고 안 되는 영어 지껄이며 외국인들한테 친근하게 앵겨붙는 사교성을 가진것도 아니고요, 해지면 칼 같이 숙소로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는 소심한 여인네입니다. 그냥 다른 여인네들보다 체력이 좀 좋고 깔끔은 좀 덜 떠는것 같기는 합니다. 택시 타서 사기당하느니 그냥 내 발로 걷겠다 배낭메고 개깡을 부리고 하나라도 더 보겠다고 전체 일정 중의 반을 밤기차에 맡기면서, 다시는 이렇게 개고생하는 여행은 안 온다 하면서도 결국 또 떠나고 있는, 참 희안한 여인네입니다.

또한 뭇사람들처럼 모든것을 던져놓고 세계여행, 이런 테마로 글을 적을 수 있는 신분의 사람이 아닙니다. 회사에 묶여있는 11년차 평범한 직딩으로 여전히 연차, 아니 반가를 낼때도 용기를 내야 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오랜기간 몸담고 있는 우리 회사는 워라벨을 중시하며 쾌적한 환경을 보증하는 곳이 아닙니다. 심지어 회사생활 대부분을 바쁨바쁨으로 항상 톱3에 랭크되고도 남는 예산부서에서 매년 주기적으로 몇 달여간은 주말출근과 밤샘을 버텨내며 그렇게 바둥거리며 살아왔습니다. 매번 휴가 출발 전날 밤을 새워가며 짐을 싸고, 시간이 부족해서 완벽한 계획을 짜지 못해 마음 한켠 찜찜함을 가진 채 인천공항행 공항버스에 오르곤 했던, 이거라도 안가면 또 1년을 버티지 못한다는 의무감에, 예쁜옷은 회사잠바로, 명품가방은 외투 주머니나 검은 비닐봉지로 대신하며 그 돈으로 항공권을 결제하곤 했던, 그냥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마지막으로 나 다운, 오스나스러운 어투와 화법은 죄송할 수도 있을 듯 하여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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