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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문 Apr 25. 2023

고정문이라는 필명


브런치에 가입하고 필명을 정하면서, 나는 큰 고민 없이 '고정문'이라 기입했다.

단 하나의 작품도 있지 않았으나, 나의 필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 필명의 유래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바야흐로 5년 전.


철없는 고시생이던 시절, 고시생활에 찌들어서인지 나는 헛소리를 입에 달고 살곤 했다.(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이를테면, '난 로또가 당첨되어도 고시공부를 할 거야'(당시 단 한 번도 로또를 사지 않았다..)라거나, '오늘 공부한다고 합격이 좌우되는 거 아니야 이 녀석들아.'(그러면서 불안해하며 다시 독서실로 들어갔다..)라거나, '난 공무원이 되면 어마어마하게 횡령할 거야'(결코 진심이 아니었다..)라는 말들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내뱉으면 기분이 꽤 유쾌해지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같이 낄낄 웃어주면 그 만족도는 더욱 높아져, 다음 헛소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어쩌면 허언증의 초기증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의 헛소리를 유쾌하게 들어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연희는 나의 헛소리에 '아~ 그래?'하며 예외 없이 늘 킥킥대주던 친구였다. 나는 그런 연희를 웃기고 싶었던지, 어떻게 하면 더 미친놈같이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곤 했다.


어느 날 연희와 함께 저녁을 먹고 독서실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날따라 늘 지나다니던 문에 쓰여있는 '고정문'이라는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세 글자를 보면서 나는 뇌를 거치지 않은 채로 입을 열어 말했다.


"오- 고정문. 사람 이름 같다. 연희야, 난 나중에 작가가 될 거야. 그러면 필명을 '고정문'으로 할 거야. 얼굴 없는 작가거든. 갑자기 고정문이라는 사람이 히트를 치면, 그건 나니까 알아두라구~"


뜬금없는 나의 헛소리를 듣던 연희는 내게 '작가가 되려고?'라거나, '근데 굳이 왜 고정문?'이라는 물음 없이, '오~멋있어.'라면서 그날로부터 나를 '작가 고정문', 혹은 '정문아~'라 불러주었다. 그날로부터 나의 필명은 정말 '고정문'이 되었다.


아마도 연희가 '작가가 된다고? 무슨 작가? 왜?'하고 캐물었다면, 내 필명 고정문은 하루짜리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연희는 아무 물음도 없이 나를 고정문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그날로부터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글을 쓰기 시작하며, 막상 '고정문'이라는 필명을 쓰려고 하니, 마땅히 이 필명을 소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 '왜 고정문입니까?'하고 묻는다면, 그럴싸하게 대답해야 할 것만 같아서.


'문은 문인데 열리지 않는 문이라, 문으로 태어났지만 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 그 애매모호함이 좋아서요.', '고정문의 역할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는 데 있죠. 제 글도 효율적이길 바라서요.' 뭐 그런 논리적인 이유를 대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나의 이런 고민을 듣던 글쓰기메이트 윤우오빠는 '그 이름의 탄생 비화 자체로 매력이 있다. 그대로 소개해라.'라고 조언해줬고, 나는 내 필명에 억지로 이유를 덧붙이지 않는데 동의했다. 연희가 '왜 고정문?'이라고 물었으면 내가 고정문이 되지 않았을 것처럼, 내가 '왜 고정문?'이라는 답을 해버리면 그것도 이름의 진정성이 떨어지는 일이니까.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오히려 더 마음이 가는 필명이었다. 그 역사만 돌이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필명이라니. 어떤 이름보다 사랑스러운 이름. 티 없는 누군가의 마음이 잔뜩 담겨있는 이름.


연희가 이 글을 언제쯤 읽을지 모르겠지만, 너와의 추억과 애정이 묻어있는 필명으로 이렇게 여기서 재밌게 잘 살아가고 있노라고 간질간질한 말을 슬쩍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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