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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고치는 달팽이 Mar 23. 2023

당신의 영광의 순간은 언제입니까?

나의 영광의 순간은 지금

 '더 퍼스트 슬램덩크' 자막판을 보고 오랜만에 슬램덩크에 다시 꽂힌 나는 덕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덕후답게 영화관 상영이 끝나기 전에 더빙판도 봐야겠단 마음을 먹었다. 마침 아직 영화를 안 본 친구가 있어 꼬신 후 두 번째로 본 영화는 처음 볼 때보다 더 재밌었다.


 우리는 산책을 하며 소감을 나누었다. 사실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인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입니까?"를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어 내가 말을 꺼냈다. (덕후는 항상 소감을 나누고 싶어 하는 법이다.)  대사가 와닿았다고 하며 친구에게 물었다. 너의 영광의 순간은 언제냐고.


 친구는 조금 길게 고민하더니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노력하며 살기는 했지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혹은 하고 싶어 치열하게 노력한 적은 없노라고. 항상 피하는 선택만 해온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말을 듣자 어쩐지 친구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캐나다 여행 갔을 때 만났던 여유롭게 지내는 사람들도 떠올랐다. 그 사람들은 치열하진 않아도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빛이 났다. 그런 것도 어떻게 보면 영광의 순간이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 질문했다. '사람이 다 꼭 치열하게 살 필요는 없으니까 빛나던 순간 같은 거는?'


 친구는 다시 없다고 대답하고 나는 어떠냐고 물었다. 나도 뭐 학창 시절에 슬램덩크의 농구부 친구들처럼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지는 않았으니까...(한국에 그런 학생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우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이라고 했다. 지금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면서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덧붙였다. 영광의 순간이 과거면 슬플 것 같다고. 아름다운 추억을 살아갈 원동력으로 삼고 싶지 다. 언제나 현재가 과거보다 빛났으면 좋겠다. 원작자 역시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고 그 답은 언제나 지금이라고 했다는  글을 보고 기뻤었다. 작가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들도, 특히 부상을 당한 강백호가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사는 게 아니라 항상 그 순간에 아름답게 살고 있을 것 같아서.(물론 백호는 얼른 나아서 농구선수가 됐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나는 원작자의 말을 전해주었고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과거사와 하고 싶은 일과 삶이라는 주제로 흘렀다. 친구는 예전에 상담을 받으며 상담사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문이 잠긴 듯한 때가 있는데, ㅇㅇ씨는 문이 막혀있지는 않은데 문을 열면 텅 비어있는 것 같다고. 그리고 어떤 유튜브에서 말하길 삶이 공허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충만한 시간이 없어서라고 했는데 맞는 말 같다고도 했다.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당황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텅 비어있다니. 정작 그 말을 한 친구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아서 나는 더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삶에 충만한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돌아보았다.


 퇴사 후 1년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쉬었지만 이제 재취업을 해야 하고 그 일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다. 근무환경도 언제나 스트레스와 야근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때가 되면 전처럼 피곤에 절어 누워만 있다가 하고 싶은 일은 못 하고 우울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다 점점 내가 원하는 삶, 좋아하는 일에서 멀어지는 게 지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뒤로도 종종 우리가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불쾌한 질문들. '너 정말 지금이 영광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어? 너 그만큼 열심히 했어? 내 인생에 치열했던 순간이 있긴 했을까?' 질문이라기보단 의심과 불신, 비난에 가깝다.


 그러면 나는 다시 객관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한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 자주 그런 말을 들었다.


 "너는 뭘 해도 될 거야."

 "열심히 사는 모습을 닮고 싶어."

 "네가 열심히 안 산다고? 그럴 리가."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열심히 산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열심히 살았던 시간들이 빛나는, 행복한, 추억의 순간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나의 과거는 지긋지긋한 현실과 불안장애를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모욕하는 엄마로부터, 나를 경멸하는 사람들 속으로 매일 들어가야 했던 과거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널 싫어할 거라는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내 과거는 상처투성이다. 물론 불가능해 보였던 걸 시도하고 변화해 가는 나를 보는 건 기쁜 일이었지만 아주 지난한 과정이었고 여전히 진행 중이며 누군가 보기에는 그래봐야 이제야 남들의 출발선에 선 모습일 것이다. 가령 배달음식 주문 전화를 할 수 있다던가, 친구와 만날 때 긴장을 덜 한다던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모임에 갈 수 있다는, 누군가에게는 숨 쉬듯 자연스럽고 누군가에게는 조금 불편할 그 정도의 일을 하는 게 나한테는 대단한 도전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 이룬 게 없다. 웹소설 쓰는 법을 배우고 연습했지만 연재를 하는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리지만 창작을 할 정도로 잘하는 것은 아니다. 브런치를 시작했지만 아직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쓴 건 없고, 인스타툰은 이제 막 시작했다. 이 모든 것도 번아웃 때문에 쉬엄쉬엄, 즐길 수 있는 정도만 해왔다.


 그림 스터디 사람들은 나를 열심히 한다고, 성실하다고 했지만 정말로 내 모든 노력을 다 했느냐고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는 다면 잘 모르겠다. 매일 1시간 반에서 2시간 4개월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빠지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는 순간엔 푹 빠져서 그림만 생각했지만 그림과 글로 먹고살고 싶다는 목표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은 노력이었을 거다. 이런 생각 때문에 친구에게도 '굳이' 말하자면 지금이 영광의 시간이라고 '굳이'라는 단어를 붙였으리라.


 이렇게 땅굴을 파고들다 다시 문득 생각한다. 슬램덩크에 나오는 아이들이 멋진 게 이겨서인가? 마지막에 NBA에 가서 농구 스타가 되기 때문인가? 물론 그들이 이룰 것이 과정을 더 빛내주긴 하겠지만, 내가 그들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결과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노력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공부하고 있지 않나? 그 노력은 대단하긴 하지만 멋지다기보단 안쓰러움에 더 가깝다.


 내가 송태섭의 서사를 보면서 감동받은 건 그가 강한 경쟁자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고, 좋아하는 농구를 열심히 하면서 꿈을 꾸고, 할 수 있다는 건강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연대하고, 그의 삶이 꽃피기 때문이다. 하루 12시간씩 농구를 했다는 자기 계발식 노력 때문이 아니다. (학교 부활동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아직 이룬 게 없어도, 남들보다 더 잘하지 않아도, 피 터지게 노력한 게 아니어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지금이 나의 영광의 순간이라고 납득할 수 있다. 스스로 인정할 수 있다.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이 있어도 뭐 어떤가. 쉬는 시간도 필요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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