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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 Apr 12. 2020

문고리를 왈칵이면 신세계가 열렸다

책상을 사다


  지금의 반절을 조금 넘는 높이로 세상을 배울 때 내게 서재는 어른의 표상이었다. 아버지의 서재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낱말로 가득했다. 단어의 쓰임을 알아가는 만큼 어른이 되는 거라고 아버지는 내게 가르쳤다. 책등에 쓰인 제목이나 겨우 읽으면서도 한쪽 벽에 꼬박 들어 찬 책장을 종일 들여다보았다. 오늘의 단어를 수집하는 작업은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초판 인쇄’의 뜻을 배우고 나서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책을 골라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책장 앞을 휘저어 다녔다. 나이가 많은 책과 나이가 더 많은 책, 나이가 진짜 많은 책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문고리를 왈칵이면 신세계가 열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옛날과 지금의 오늘이 한 뼘 거리에 있었다. 시간의 바깥이었다.

  아버지는 그 한 뼘 사이의 어느 지점으로 자주 사라졌다. 나는 정말로, 아버지가 사라진다, 고 생각했다. 안에서 닫힌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그 뒤로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른들은 종종 사라져야만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해묵은 책에 코를 박고 킁킁 대다가도 아버지가 들어오면 금방 자리를 비켰다. 놀이터를 내주는 셈이었지만 겸연쩍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서재를 갖추어 보기로 했다. 마침 책상이 필요했다. 서재는 어른의 공간이었지만 어른이 되기를 기다렸다가는 영영 서재를 마련하지 못할 거라는 예지가 작렬했다. 일필에 배치도를 그렸다. 상상하는 서재의 모습은 지금까지 줄곧 하나였다. 검은색 가죽 의자에 앉아 책상 위로 턱을 괴면 마주 선 벽 대신 천장을 이고서도 꼿꼿이 척추를 편 책장이 멀찍이 보였다. 20년도 더 지난 청사진에 조명을 하나 보태고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앉아 가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들여야 할 것은 책상이었다. 그 앞에 앉아 뭐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책상 앞에 앉아 주로 무언가를 적거나 낚싯대를 닦았다. 내가 몰래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지만 절대로 이쪽을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 궁금한 어린 딸을 향한 다정이었는지 혹은 안식을 위한 외면이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머리가 제법 크고 나서는 아버지를 방해하지 않았다. 서재 안에서 그는 구도자였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방 한 켠에 책상을 놓았다.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모든 집기가 손에 닿는다. 이로써 절반은 완성이다. 나머지 절반은 의자의 역할이다. 소명 없는 삶이 제게 어울린다는 어느 목수의 말마따나 정갈한 책상 한 좌를 들이고 나니 쉴 새 없이 손가락을 꼬물거린다. 향을 피우고 차를 데우고 좋은 음악을 찾고 책을 읽는다. 필사를 시작했다. 사실 서재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과 단절되어 무엇과도 투쟁하지 않는 감각, 서재로 향하는 인간은 그 걸음만으로 이미 목적에 달한다. 간이 의자에 호젓이 앉아 세상의 모든 비밀을 너에게 들려주겠다고 다짐한다.


  아버지는 더 이상 서재를 찾지 않는다. 대신 시간을 쪼개어 밭을 일구고 나무를 기른다. 계절이 주는 선물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항상 두 번째 사과 조각을 당신 입에 넣고야 마는 아버지는 기력이 다 쇠한 노인 같다가도 어느 순간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문 밖으로 세상을 가두었던 동안 아버지는 정도正道를 찾으셨을까. 나로서는 여전히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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