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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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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 Feb 08. 2022

당신은 이곳을 사랑하느냐 묻고 싶었다

인쇄물을 사다


  수개월을 기다려 온 공고문이 떴다. 청약을 넣기 시작한 이래, 당첨 확률이 가장 높은 아파트였다. 비인기지역에 분양가가 예상보다 높게 책정된 덕에 설령 예비를 받는다 해도 순번이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출퇴근 시간을 가늠할 겸 대중교통을 이용해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두 번째 임장이었다. 누구들은 물건을 보지도 않고 매수를 결정한다는데 두 번째 임장이라니. 창 밖의 낯선 풍경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선뜻 작심을 하지 못해 마음이 오래 어지러웠고, 더 이상은 멀미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눈에 보이는 확신을 찾으러 다시 한번 길에 올랐던 것이다.


  청약 접수 당일, 아파트니 뭐니 하는 것들은 죄다 제쳐 두고 강릉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청약을 넣지 않기로 마음 먹었지만 공고문이 뜬 후로 밤낮없이 골몰해왔던 탓에 여독이 무겁게 내려앉아있었다. 딱딱한 좌석에 모로 기대어 핸드폰을 켰다. 가고 싶은 카페들과 서점, 작은 영화관, 그리고 선물 가게들이 쓰여있는 납작한 체크 리스트를 살피며 지도 내에 스폿이 밀집되어 있는 곳들을 둘러보았다. 오래전,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이야기를 꺼내어 놓고 싶었던 때, 독립 출판물에 관심을 갖게 되어 곳곳에 있는 작은 서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을 어찌해보고자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나보다는 서점을 운영하시는 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로컬 창작자들의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판매 수익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사장님의 너털웃음은 적어도 나의 먹고사니즘보다 숭고해 보였다. 당장의 밥그릇보다 제 것을 지키는 일을 삶의 앞 줄에 세운 사람들. 이 결단을 지켜내기 위해 작은 공동체를 만들고 지역 문화를 가꾸어 다시금 존속을 도모하는 그들을 보며 마음 한편이 괜히 뭉클했다. 그들의 자립이 어째서 응원으로서 가슴께에 와닿았을까.


  특별한 계획 없이 골목을 배회하다 노란 단층 가게를 발견했다. ‘유리 공예’라고 쓰여있는 창문 안 쪽을 보며 의뭉스런 마음이 피어오르기도 했지만 달리 갈 곳이 없어 가게 문을 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게 안을 세 바퀴째 둘러보는 중이었다. ‘바다 유리’, 강릉을 모티브로 한 인쇄물, 다른 창작자와 함께 만들어 낸 결과물. 슥 둘러보고 나가야겠다는 가벼운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인쇄물을 제외하고는 사고자 했던 제품들이 모두 비매품이어서 아쉬웠지만,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고개를 숙이며 다음에 다시 찾아뵐 때까지 이곳에서 안녕하시기를 기원했다. 햇빛은 모처럼 따뜻했고 겨울 바다는 듣던 대로 매서웠다. 누가 붙였는 지는 몰라도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는 다른 활자로 대체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방금 막 가지고 나온 인쇄물을 꺼냈다. 강릉의 바다 어느 한 폭에 4개의 시간축을 세워 그린 그림이었다. 하나의 풍경을 여러 시간에 걸쳐 지켜보는 사람의 동기를,당시의 감상을, 그것을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을 들추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당신은 이곳을 사랑하느냐 묻고 싶었다.


  가게 앞 해변에서 바다 유리 대신 조개껍데기를 잔뜩 주웠다.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조개껍데기들도, 깨지고 마모된 껍데기들도 형형색색 고왔다. 손가락에 걸려오는 플라스틱 조각을 보며 다음 여행에는 바닷가 쓰레기를 줍는 일정을 따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아끼는 것이라면 나도 소중히 대해야지. 모래알 사이로 수개월 동안 답을 내놓지 못했던 아버지의 질문이 돌연 튀어 올랐다. ‘집이 갖고 싶은 거야, 아니면 투자가 하고 싶은 거야.’ 물음표가 채 찍히기도 전에 보기에는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사랑하며 살 터전을 찾고 있었다. 단순히 몸 뉘이는 것으로 기뻐하지도, 오르는 실거래가에 마냥 만족하지도 못할 테다. 이사가 잦았고 동네 친구들이 자주 바뀌었다. 고향이라고 부를 곳이 없어 8개월이나마 마음 붙였던 부산을 장난 삼아 고향이라 여겼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에 적합한 밀도를 가진, 바다가 지척인 곳. 그리고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의 문화를 지켜나가는 곳. 한 때는 유랑하듯 사는 삶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정착이 하고 싶다. 당장은 쉽지 않겠지만, 그런 곳에 터전을 세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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