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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Jun 24. 2024

건전한 정신, 흔들거리며 걷기

이별 후 1

더운 여름날 유니클로에서 쇼핑을 하고 스타벅스에 왔다. 글을 쓰기 위해서다. 오늘은 가디건을 챙겨나오지 않았는데 에어컨 바람이 상당히 세다. 추워서 처음으로 따뜻한 차이 티 라떼를 시켜보았다. 따뜻한 맛이다. 실제 온도도 그렇지만 맛 자체가 달콤하고 매큼한 것이 겨울의 것이다. 한여름에 한겨울 같은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차이티 라떼를 마시는 삶이란 참으로 사치스럽다. 즐겁다. 감사하자면 끝이 없다. 창 밖에 나풀거리는 무수한 나무의 잎사귀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연두빛 찬란함. 단 한 그루의 나무에서도 무수히 많은 초록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모여 더욱더 무수한 풍경이 된다. 자연은 그렇게 무수하다. 셀 수 없이, 헤아릴 시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글쓰기는 자유의 감각을 준다. 머릿속이 언제나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어떠한 수정이나 숙고를 거치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을 잠시의 지체도 없이 바로 활자로 늘어놓는 과정은 넘치기 직전의 댐을 풀어주는 것과도 같다. 풀어준다기보다는 그냥 어쩔 수 없이 흘러넘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흘러넘친다. 항상 넘치기 직전이다.


그래도 요즘은 정신적으로 많이 건강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미대 다닐 때, 20대 초반에는 정말로 우울했다. 그때 우울증이 제일 심했을 것이다. 등교가 버거웠다. 뭐든 수치로는 잘 해내고 있었지만. 의대에서는 본과 1학년 때 우울했다. 공부가 너무 지겹고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꽤 많이 힘들었던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했던 가장 최근의 연애. 그것이야말로 내게 가장 큰 감정의 폭풍을 느끼게 했는데, 막상 그것이 지나고 난 다음의 정신에는 상당히 뭐랄까, 건강한, 건전한 토대가 생겨나 있다. 어쩌면 살아온 세월 중에 가장 건강한 마음가짐이 된 것 같다. 이게 대체 뭘까?


어떤 마음가짐이냐 하면 감정의 너울은 어찌해도 올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걸 탈 줄 알게 된 것 같다. 무력감이나 우울감이 닥칠 때 아 아무튼 그냥 살면 돼~ 하면서 그냥 살면 그게 지나가버리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별이란 것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인지 이전에는 몰랐는데 그걸 철저하게 느끼고, 경험하고, 체감하고, 그리고 회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고통의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인간의 회복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알게 되었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다른 인간의 회복력이 어떠한지는 내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내 회복력이 강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 맞겠다. 나는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작은 통증에도 민감하게 몸을 움츠리며 어린애처럼 치과를 피하던 나였다. 그러나 약해도 되었기 때문에 약했을 뿐이었다. 강할 수도 있었다. 그냥 조건과 선택의 문제였다. 이런 게 성장일까? 신체적인 고통도 정신적인 고통도 어느정도는 그냥 느끼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피할 수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다. 느끼는 수밖에. 그러다 보면 지나간다. 그럼 괜찮아진다.


그리고 무엇을 하면 내가 더 괜찮아지는지를 하나하나 다시금 알아가고 있다. 최근에 얻은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는 내가 나의 정신적, 신체적 잠재력을 하루 중 충분히 사용하지 않으면 불쾌함과 초조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이 정신적, 신체적 체력을 각각 충분히 사용하고 나면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편안하고 자유스럽고 상쾌해진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에 드는 과정이 기분이 좋아진다. 일상에 뿌듯함과 즐거움을 느끼며 남과 비교하고 싶은 욕망이 사그라들고 그냥 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이 ‘잠재된 시간과 능력, 체력’을 사용해내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시간, 능력, 체력을 통틀어 ‘잠재력’이라고 정의해 보았을 때 이를 약 80~90%정도 사용했을 때 가장 쾌적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꼭 생산적인 일이 아닐지라도 일단 뭐라도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내 상태를 가능한 한 쾌적하게 유지하는 것이 일상의 중요한 책무이다.


나를 돌보기. 최근에는 그것을 제 1의 우선순위로 두고 있다. 모닝페이지를 쓴 지 어느덧 두 달 정도가 되었는데 얼마 전 페이지에서 한 가지 더 깨달음을 얻었다. 나를 잘 돌보는 것, 어느정도는 나의 기분을 유쾌하게 유지하는 것이 나 스스로와 주변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주변인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일을 잘 해낼 때 비로소 그토록 갈망했던 여유가 생긴다. 마음의 여유로움. 아주 가끔이지만 그 멋진 여유로움이 생겨나는 듯한 순간들이 있다. 그럼 그 순간이 생겨나기 전의 상황을 역순으로 추적해보면 공통적인 조건들이 있다. 우선 내가 기분이 좋아야 하고, 타인의 기분을 섬세히 살필 정도의 마음의 공간이 있으며 실제로 그럴 수 있도록 행한 경우이다. (당연히 기분이 그렇지 못할 때도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항상 성공하지는 못한다. 적어도 여유로움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는 노력과 발전이 필요한 별개의 영역이다.)


아무튼 요점은 좋은 기분의 유지가 여유로움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기분이 나쁠 때에도 유쾌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분이 더 자주 좋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쉽고 효율적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기분이 좋은 상태를 가능한 자주, 오래 유지해내는 것이 중요하고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 나를 돌보며 내가 어떨 때 기분이 좋을 수 있는지를 찾아간다. 글을 쓰면서도 찾고 타인과 이야기하면서도 찾고 일하면서, 책 읽으면서, 산책하고 생각하면서 찾는다. 잘하고 있는 같다. 산책과 글쓰기가 특히 도움이 많이 된다. 휴학으로 해야 일상이 사라졌기에 자신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가 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좋은 점을 보려고 하면 많은 것이 좋다.


몇 번이고 흔들리고 흔들려서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계속 흔들린다. 근데 그게 딱히 문제될 건 없다. 그냥 흔들린다. 아무튼 걷고 있으니까. 그걸 허용해줘야 한다. 꼬리를 물고 있는 뱀과 같다. 흔들림을 허용해야 아무튼 걸을 수 있다. 아무튼 걸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흔들. 걸음. 그냥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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