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호/5] 징검다리, 백조, UFO, 밤의 영혼들

by 심성훈


1) 징검다리

뒤로는 화봉산과 우성이산이, 앞으로는 갑천이 자리 잡고 있는 배산임수 지형의 전민동. 산과 물 사이에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기묘한 안정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준다. 물이 흐르며 뿌리 깊은 나무가 서 있다는 것. 수직과 수평을 완만하게 가로지르는 그것은 삶에 대한 건강한 긴장감이기도 하다. 여름이면 갑천의 물은 긴박하게 불어난다. 하천 변 둑까지 넘친 물을 볼 때면 평소엔 잔잔히 흐르는 듯한 갑천도 사람과 뭇 생명의 생명을 순식간에 집어삼킬 수 있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다가도 가을이면 찬란하게 출렁이고 겨울이면 깊은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봄의 여명과 함께 반짝이며 깨어난다.

갑천은 환상적인 요소가 많은 하천이다. 갑천은 일정 구역마다 드문드문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절대 좁지 않은 폭이지만 과감하게 놓여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다보면 중간쯤에 이르러서는 물 한 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기분과 함께 양쪽 귀를 가득 채우는 물소리에 함몰된다. 여러 징검다리 구역 중에서도 엑스포아파트 부근에 위치한 징검다리는 물살이 세게 흐르는 구간이라 특히 더 강렬한 물소리에 압도된다. 그리고 반대편 끝까지 건너가서 내가 왔던 곳을 바라보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서 있었던 그곳이 마치 아주 다른 곳, 나와 분리된 '저' 곳인 것처럼 착각이 든다. 내가 속한 세상은 몇 개의 징검다리와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멀어졌다가 가까워진다.

최근엔 거의 해보지 않았지만, 고등학생 시절에는 종종 한밤중에 징검다리 가운데에 가서 누워 있고는 했다. 새까만 세상 속에서 내 시야가 닿는 모든 범위는 어두운 하늘로 가득 차 있고, 양쪽 귀로는 세찬 물소리가 들려온다. 온몸에 힘을 풀고 누워서 하늘에 수 놓인 북두칠성의 길을 쫓다 보면 다른 세계로 이행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나의 시간을 잊고는 했었다.


2) 백조

잊힌 시간 사이로 백조의 이미지가 비친다. 갑천에는 한 때 백조가 왔었다. 바로 이곳, 전민동 유역에.

초등학교 시절에는 엄마, 여동생과 함께 갑천 산책을 자주 가곤 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차갑고도 푸근했던 어느 겨울날, 반투명한 이불처럼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갑천 위에 비현실적인 자태로 옹기종기 모여있던 백조들이다.

갑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백로나 왜가리, 오리들과는 확연히 다른 외양과 아우라에 마치 상상의 동물을 마주한 것만 같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는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없을 때였는데, 사람들이 거의 없는 반대편 물가 쪽에 서너 마리가 모여 둥둥 떠 있곤 했다. 겨울마다 백조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그들의 출현은 어린 마음에도 문명의 맹목적인 우상들을 깨뜨리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백조들의 흰 빛과 우아한 곡선은 잿빛 콘크리트와 경쟁으로 가득한 인간 문명에 원시적인 신성함과 긍휼함을 일깨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백조들이 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시간이 한참 지난 후 고등학생 쯤이었던 것 같다. 그 사이에 갑천에 무슨 변화라도 생긴 것이었을까? 갑천 생태계에 문제라도? 그렇더라면 다른 새들에게도 변화가 있어야 할 텐데 백조만 사라진 것이 의아했다.

지난 추석 연휴에 갑천 산책을 하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오후, 망연히 걷던 중 무심코 탐조대 앞에 서게 되었다. 엑스포아파트 부근 갑천변에는 2022년에 만들어진 '갑천 탑립돌보 탐조대'가 있다. 네 대의 망원경이 있어서 주변에 서식하는 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평소에는 무관심하게 지나치던 곳인데 이날은 우연히 탐조대 지붕 밑까지 들어갔다가 새들에 대한 설명이 적힌 안내판을 보게 되었다. 그중에 '큰 고니'라고 표기된 백조에 대한 설명이 있어 자연히 눈길이 향했다. 큰 고니는 2000년대 초반부터 대전에서는 오직 갑천에서만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곳 탑립돌보와 월평공원을 중심으로 매년 20개체 내외가 활동한다고. 그런데 4대강 사업이 진행 중이던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그 이유 때문이었구나. 기억난다. 갑천에 온통 포크레인과 트럭들이 왔다 갔다 하던 때가 있었다. 갑천에 보가 생기고, 군데군데 녹조가 가득하던 그런 때. 그런데 안내판의 말미에는 2013년부터는 큰고니가 다시 돌아왔다고 끝맺고 있다. 이후에 백조들이 돌아왔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직접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겨울에도 심심치 않게 갑천에서 조깅 하거나 걷기를 하는데 어린 시절 이후 나에게 백조는 갑천을 떠난 존재들이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데, 어쩌면 내가 못 본 것일지도.


3)UFO

그런가 하면 루머처럼 여겨지고 있으나 두 눈으로 목격한 것도 있다. 안개가 잔뜩 낀 날이었다. 친구와 함께 갑천을 걷고 있었는데 허공 저편 어디에선가 하얀 구체가 나타났다. 대화를 하며 걷는 동안 줄곧 주시했는데 앞으로 가면 갈수록 구체는 색과 형태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크기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은 채로. 혹시 낮에 떠 있는 달인가 싶었지만 달은 아니었다. 음모론으로 들어오기만 하던 UFO를 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과 추측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봐도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이었다. 저 물체는 무엇일까.

소름이 끼치기 시작할 무렵 주변에 검정 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윽고 안개가 조금 걷히자, 전선에 중간중간 달린 동그란 흰 구체였음이 밝혀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두려웠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떨게 한 것일까? 설령 그것이 진정으로 외계 생물체였다고 하자. 내가 두려워한 게 외계 생물체였을까? 만나본 적도 없고 어떠한 정보도 없는 존재에 대해서 내가 느꼈던 두려움은 무엇일까. 그리고 치가 떨리듯 솟아났던 모멸감과 불쾌감. 짧은 순간에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나조차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꼈었는지 궁금하다. 지금까지도 그 느낌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이 감각은 무엇이길래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


4)밤의 유령들

구병모 작가의 장편소설 『아가미』 194쪽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어느 날엔가 갑천변 둑에 심긴 나무에 찢어진 천막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우연히 물에 밀려왔거나 바람에 날려 왔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설치된' 듯한 천막의 모양새는 순간 그 현장을 마치 연극 무대처럼 보이게 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나지막이 울린다. 무대 뒤 벽으로는 어둠 속에서 유연한 속도로 지나가는 교각 위의 KTX 그림자. 무대의 막에 조명이 비친다. 막 중심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다. 유령의 얼굴 같은 잔상을 남기는 구멍. 관객들은 그 앞에 서서 저 구멍 너머에서 들려올 어떤 음성을, 신호를, 기다린다.

모르는 것들뿐인 세계에서 모르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모른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계속해서 흔들리기에, 변화하기에, 달라지기에, 고정할 수 없기에, 영원할 수 없기에, 불안한 것. 결코 '앎'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므로.

나의 세계는 흔들리면서 흘러간다. 막막하지만 부딪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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