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9일과 윤달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작년 8월에 요가원을 정리했고
올해 2월에 폐업 신고를 했다.
작년 8월부터 내 개인적인 수입은 없었고
이제 남은 거라곤 폐업할 때 지출한 금액 중
소상공인 희망리턴 패키지에서 들어올
폐업 지원금 250만 뿐이다.
일기장에 가까운 블로그를 꽤나 오래 운영했지만
매일 몇백 원에서 몇 원에 이르는 티끌 같은 돈만
쌓이고 있다.
돌아보니 고정적으로 내 몫으로 나가는 돈은
내가 벌어들이는 돈에 비해
현저히 큰데도
나는 내 일상을 변함없이 어제와 같이
영위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마치 우리 남매를 공부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던 엄마의 희생을 마주했을 때처럼
감사함과 원망이 함께 드는 기분이다.
내가 남편이 벌어오는 월급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 현실로
내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종종 좁은 방에 갇힌 기분이 들기도 한다.
지금 내 역할이 가정의 안정과 아이들의 양육에
맞춰져 있음을,
그 역할이 창출하는 가치가
월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의 우선순위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언젠가부터
주어진 조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만족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내가 어설프게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남편 월급으로 알뜰하게 잘 살자. 이렇게 말이다.
아차.
그런데 나는 그 알뜰의 개념조차 없었다는 걸
아니 감사함과 원망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려 돈이라는 것에 무심하고 무지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지난 2월에 남편의 월급에서
연말정산 마이너스 환급금이 빠져나갔다.
나는 앞뒤 없이 환급금이 얼마나 도대체 왜 빠져나갔냐고
이제껏 토해낸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않냐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곱씹어보면
부끄러워진다.
나는 이제껏 연말정산이 무엇인지
환급금은 왜 어떻게 무슨 이유로 받는 것인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보너스라고 생각했고
그 보너스로 짧은 여행이나 설 명절을 여유롭게
보내겠다는 생각에 늘 기분만 좋았었다.
그런데 올해 처음,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이 환급금을 토해냈다고 했을 때
'처음'이라는 것보다
이것이 무슨 돈인지 조차 모르고
흘려버린 나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공부하자, 내년엔 반드시
다시 환급금을 받아내자.
여행도 가야 하고 명절에 용돈도 드려야 하는데
받아내야지 받아내야지 하면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수박 겉핥기처럼
ISA에 가입하고 연금저축에 가입하고
아이들 용돈 통장을 청약으로 갈아타서 세제혜택을 받겠다고
은행으로 갔다.
그날은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달, 2월 29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내 이름으로 된 연금저축계좌는
연말정산에서 세제혜택을 받을 수 없고
남편이나 나의 청약 통장은 조건이 안 맞다.
아이들 청약 역시 세제 대상이 아니었다.
이제 유치원에 간 윤성이의 청약 통장이
청약으로서 큰 의미가 있겠냐만은
(심지어 이자도 다름 금융상품에 비해 턱없이 낮다.)
그래도 가입해 두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펀드를 권하는 창구직원의 말에
차마 펀드가 뭔지를 몰라요 라는 말은 못 하고
나머지는 예금으로 얼마는 청약으로 자동이체를 걸겠다고 했다.
아마 창구에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나의 무지한 금융지식, 금융문맹에 대한
자괴감이 몰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앉자마자 내가 여기 왜 왔는지
남편이 연말정산을 토해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마음이 급해졌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렇게 어리광이라도 부르고 싶었던 건가
그냥 자괴감이 몰려왔다.
심지어 권유하는 펀드도 모르는데
무슨 바구니라는 설명에 1도 이해가 안 가는데
이 바보야 바보야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렇게 한 동안 풀이 죽어 기다리는데
청약 통장을 만들던 직원이 말했다.
'그럼 이 통장에서 청약으로 2만 원씩
자동이체는 매 달 29일에 빠져나가도록 할게요!'
나는 무심하게 네라고 대답하고
순간 스치는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그날 아침 운동 단톡방에 어떤 분이
오늘은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달, 2월 29일이에요!
라고 남겼다.
아뿔싸, 4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날을
자동이체 날로 걸겠다고?
뭐 사고의 회로 따위도 없다.
그냥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4년마다의 29일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고
바로 입 밖으로
29일이요???
라고 직원에게 다급하게 말을 했다.
차마 그것만은 안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직원은 다행히 웃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매 달 29일이라고
3월 29일, 4월 29일에 빠져나갈 거라고.
세상에나, 어쩌면 좋냐.
내 성격이 거기서 아하하하하 웃으며
내가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며
웃으며 넘길 성격도 못 되고
그저 진지한 표정으로 '아, 네'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앉은 이 의자 밑으로 싱크홀이라도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낯이 부끄러워 당장이라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나의 무지에 대해, 생존의 여부를 판가름한다는
금융문맹에 대해 한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아이고 세상에나.
그래서 그날은 집에 돌아와 일기장에 2월 29일에
대해 기록하고
남편에게 고백하듯 털어놓고 그제야 웃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박장대소가 나왔다.
윤년에 한 번씩 넣는 청약이라.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책을 찾게 만들었다.
아직 그날과 별반 다를 바 없지만
나는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
돈에 대한 무지, 하지만 그 안에 감춰진 나의 욕구에 대해서도.
정말 다행이다. 마흔이 되기 전에
아이들이 꼬박꼬박 용돈 받아가기 전에
금융 문맹을 깨달았다.
그래서 시작한 공부를 조금씩 기록하고
적용하고 쌓아갈 생각이다.
4년 뒤에 돌아올 2월 29일에는
많이 성장한
나 자신을 기록하고 칭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