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함이 '비용'이 되어버린 사회에 대하여

키오스크 뒤로 숨어버린 우리의 온기

by 불완젼

자주 가던 식당을 잃어버렸다. 맛이 변해서도, 가격이 올라서도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태블릿, '테이블 오더'가 생긴 직후의 일이었다.


사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식당에서 "저기요"라고 손을 드는 일조차 쭈뼛거리는 나에게, 비대면 주문 시스템은 꽤 반가운 변화였다. 직원을 부를 필요도 없고, 메뉴를 천천히 고를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가.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테이블 오더로 주문한 음식은 평소와 달리 너무 매웠고, 당면은 설익어 씹히질 않았다. 심지어 추가로 주문한 공깃밥은 식사가 절반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확인을 하려 해도 태블릿 화면은 이미 초기화된 상태였다.


지나가는 사장님을 조심스럽게 불러 세웠다. "사장님, 저희 아까 밥 시킨 건..."

사장님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곧 나가요."

그러곤 홱 주방으로 사라지셨다. 텅 빈 홀에는 우리 테이블밖에 없었다. 손님 응대 시간이 확연히 줄었을 텐데, 사장님의 표정은 전보다 더 피로해 보였다.

잠시 후, 사장님은 공깃밥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다시 키오스크 뒤로 숨어버리셨다.

그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몇 년째 이어오던 단골 식당 하나를 마음속에서 지웠다.


효율이라는 이름의 '떠넘기기'

어딜 가나 키오스크가 기본인 세상이다. 물론 장점은 있다. 주문 실수가 줄고, 직원은 단순 반복 업무에서 해방되어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다. 기업들이 내세우는 '업무 효율성'과 '서비스 질 향상'이라는 명분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묻고 싶다. 그 효율성으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예전에는 종이에 '바를 정(正)'자를 그려가며 주문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조금 느리고 서툴러도, 그곳엔 '대화'가 있었다. "이건 좀 매운데 괜찮으세요?", "알러지 있는 재료는 빼 드릴까요?" 그런 사소한 관심들이 모여 '서비스'가 되었다.


지금의 카페는 어떤가. 키오스크 화면 속에는 '연하게', '얼음 적게' 같은 기본적인 옵션뿐이다.

"양은 좀 적어져도 괜찮으니 우유를 조금만 덜 넣어주세요"라는 나만의 취향을 말하려면, 결제 후 번호표를 들고 카운터 앞에서 직원의 눈치를 봐야 한다. 밀려드는 주문표를 쳐내기 바쁜 직원에게 내 취향은 그저 '처리해야 할 귀찮은 요구사항'일 뿐이다. 전문가로서의 조언이나 메뉴 추천 같은 '퀄리티 높은 서비스'는 이미 효율성이라는 칼날 아래 삭제된 지 오래다.


키오스크 앞에서 작아지는 부모님의 등

더 슬픈 건, 이 편리함이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벽이 된다는 사실이다. 부모님은 키오스크 앞에만 서면 작아지신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긴장해서 식은땀이 난다고 하셨다. 그래서 늘 뒷사람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그들이 누르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며 공부한다고 했다.


"직원에게 좀 도와달라고 하지 그랬어." 내 말에 엄마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어봤지. 그랬더니 저기 그림 보고 순서대로 누르라고 하더라."


그 순간 깨달았다. 불친절한 건 기계가 아니라, 기계 뒤에 숨은 사람이었다.

"키오스크가 있으니 네가 알아서 해"라는 태도. 서비스직이 응당 제공해야 할 배려와 안내를 기계에게 떠넘기고, "나는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 태도 말이다.

물가는 오르고 최저시급은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의 두 배가 되었다. 내 지갑에서 나가는 돈의 가치는 올랐는데, 왜 나에게 돌아오는 온기는 반토막이 났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불친절해지는 굴레

대형마트의 풍경도 다르지 않다. 계산대의 캐셔 분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셀프 계산대가 채웠다. 바코드를 찍고, 봉투를 사고, 물건을 담는 것까지 모두 손님의 몫이다. 직원은 그저 멀찌감치 서서 혹여나 내가 바코드를 안 찍고 가져가는 게 없는지 CCTV처럼 감시할 뿐이다. 노동은 내가 했는데, 잠재적 도둑 취급까지 받는 기분이다.

나도 안다. 서비스직의 고충을. 나 역시 수많은 '진상' 고객들을 상대해 봤으니까. 키오스크는 어쩌면 방어기제였을지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감정 쓰레기통 취급을 하는 무례한 고객들을 마주하기 싫어서, 차라리 기계 뒤로 숨는 것을 택했을 수도 있다. 고객이 불친절해서 키오스크가 생겼고, 키오스크 때문에 직원이 불친절해지고, 그 불친절함에 고객은 다시 날카로워진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악순환이 반복된다.


AI는 절대 모르는 '눈치'라는 친절

결국 우리는 '친절함'마저 비용으로 지불해야 하는 사회에 살게 된 걸까. 요즘 AI는 놀라울 정도로 말을 잘한다. 하지만 AI의 친절은 학습된 데이터일 뿐이다. 입력된 값을 출력하는 친절에는 온도가 없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친절은 '맥락'을 읽는 것이다. 들어오는 손님의 지친 표정을 읽고 물 한 잔을 먼저 건네는 센스, 아이와 함께 온 부모를 위해 구석 자리로 안내하는 배려,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는 어르신에게 다가가 "제가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 따뜻함. 이런 '눈치'와 '느낌'은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상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다.

점점 더 차가워지는 서비스 현장을 보며, 차라리 감정 없는 기계가 응대하는 게 낫겠다는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퇴근길, 월급날이라며 양손 가득 장을 봐와서 행복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면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결국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 기계가 노동을 대신할수록,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효율'이 아니라 그 빈자리를 채울 '온기'일 것이다.

키오스크 화면의 "주문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보다, "어서 오세요"라는 사람의 인사가 더 그리운 날이다.



북커버 : 생성형 AI Gemini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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