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란 이름의 타인

빈티지 코트 대신 롱패딩을 입었다.

by 불완젼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과연 온전한 내 것일까?


​"요즘 티비만 틀면 나오는 쟤가 제일 예쁘더라."


​저녁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던 엄마가 무심코 툭 뱉은 한마디였다. 엄마의 시선은 화면 속 여배우 A에게 꽂혀 있었다. 다시 보니 엄마 말대로 예쁜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엄마가 "예쁘다"라고 말하기 전까지 나는 A라는 배우에 대해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는 'A는 예쁜 연예인'이라는 공식이 각인되었다.


​며칠 뒤, 동생과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다가 문득 A가 생각나 엄마 흉내를 냈다.

"야, 요즘 드라마 나오는 A 진짜 예쁘지 않냐?"

​내 말에 동생은 갸우뚱하며 커피를 휘저었다.

"글쎄? 내 회사 사람들은 다 B가 훨씬 매력 있다던데?"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확고한 기준들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 걸까.


엄마는 회사 동료 아줌마들과 A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며 '예쁨의 기준'을 만들어왔고, 동생은 직장 동료들과 B에 대해 이야기하며 또 다른 기준을 세웠다.


​나는 A와 B, 둘 다 잘 몰랐다. 하지만 엄마와 동생 덕분에 내 안에는 어느새 두 개의 기준이 자리 잡았다. 나의 '좋음'은 사실 타인의 '좋음'을 답습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대화 속에 습관처럼 평가를 섞는다. 예쁘다, 못생겼다, 힙하다, 별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분명 괜찮다고 느꼈던 옷이나 노래도 주위에서 "그거 좀 별로지 않아?"라고 하면 순식간에 마음이 쪼그라든다. '내가 보는 눈이 없나?', '이게 이상한 건가?' 하며 내 감각을 검열하고, 결국엔 "아, 다시 보니까 좀 별로네"라며 타인의 평가 뒤로 숨어버린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내 주관이 뚜렷하다 믿어도, 우리는 결국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무리에 섞이기 위해 본능적으로 눈치를 살피기 마련이니까.


​이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혼란스러워진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취향은 정말 나의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만들어진 취향일까. 나는 그저 유행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무임승차한 것은 아닐까. 정신을 차려보면 남들이 괜찮다, 좋다 하는 것들로 온몸을 두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요즘은 '자기표현'의 시대라고들 한다.

예전에는 콤플렉스라며 가리기 급급했던 주근깨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힙'한 태도로 추앙받는다. 자신이 좋아한다면 명품이 아니더라도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을 입고, 남들의 평가보다는 나의 만족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기이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가리지 않는 주근깨를 보며 "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멋지다"라고 찬사를 보내는 순간, 사람들은 다시 '주근깨 메이크업'을 하며 없는 주근깨를 그려 넣기 시작한다. 내가 나만의 취향으로 고른 옷을 누군가 "예쁘다"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곧 유행이 되고 너도나도 입는 '흔한 옷'이 되어버린다.


​결국 '나만의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조차, 다수의 선택을 받는 순간 변질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의식하고, 남의 시선을 욕망하며, 그 속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진짜 예쁘고, 못생기고, 괜찮고, 별로인 것을 가르는 온전한 기준.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아서,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을 때야 비로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현관 앞에 서서 고민한다.

내 취향이 가득 담긴 낡은 빈티지 코트를 만지작거리다, 결국 손을 놓는다. 그리고 길거리 어디에서나 볼 법한 검은색 롱패딩을 걸치고 집 밖을 나선다.



​그것이 가장 따뜻하고, 주위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니깐,




*북 커버 이미지

생성형 AI Gemini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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