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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Aug 04. 2021

킹, 거리의 이야기, 당신의 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지만 어떤 존재는 쌓아두고 외면하는 쪽이 편리하다. 시선을 둘수록 걷잡을 수 없는 무엇을 외면한다. 그런 범상한 선택마저 누구에게나 허용되진 않는다.

대상이 무엇이건 존 버거는 아름다움의 구조를, 구조의 틈새를, 틈새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거리의 개 ‘킹’이 가로지르는 하루에도 그런 시선이 드러난다. 달갑지 않은 거대한 뭉텅이의 면면이 조밀하게, 자세히 보아도 아름답지 않을 이들의 기원이 서정적으로 추적된다.

존 버거의 작품을 꾸준히 발간해온 열화당 단행본 중에서도 <킹-거리의 이야기>는 담백하게 아름답다. 활달한 내달림을 쫓아 마주한 거리의 끝이 예상을 비켜가진 않지만 답을 확정하지도 않는다. 문득 잠에서 깬 새벽 자각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속삭임 같은 울림을 준다.



확신할 순 없다. 여기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과장을 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가끔은 과장 역시 조금 더 따뜻해지는 데 도움이 되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끼칠 피해를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결정한다.


킹이 사는 생 발레리는 개발 예정지로 방치된 쓰레기 산이다. 이곳의 거주자들은 발 밑의 쓰레기로 매일을 유예해간다. 흔한 사연의 인물들이 그렇듯 그들도 부랑민으로 태어나진 않았다. 중산층은 아니라도 건실한 노동자였던 비코, 야나체크를 연주하던 비카는 단 한 번의 작은 균열에 부슬부슬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흘러내린 삶은 절대 복구되지 못한다.

세상의 끝 같은 이곳에서도 일상은 참 끈질기다. 누군가는 결국 이곳에 흘러들고 누군가는 죽음으로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가장 무용한 이의 목소리는 가장 아름답다. 밖에서 보기엔 그들이 도착해 완성된 쓰레기지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는 약자들에게 강자들이 느끼는 증오는 인간만의 특징이다. 동물들 사이에선 그런 일이 없다. 인간들에게는 존중돼야만 할 거리가 있는데, 그게 지켜지지 않았을 때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는 쪽은 약자들이 아니라 강자들이고, 그 모욕감에서 증오가 생겨난다.


실수는, 킹, 적보다 더 미움을 받는 거야. 실수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인데, 만약에 있다면 덮어야만 하지. 우리는 저들의 실수야.


더러운 일을 견디는 것, 자존심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이를 드러내 보였다.


개라는 종의 특권일까? 킹은 암울함이 고인 곳에서 봄을 낙관한다. 여지없이 오늘치의 부조리를 뒤집어썼지만 굴복하지 않는다. 오전에서 오후를 가로지르고 거리 안팎을 오가는 킹은 풍경의 일부로 당당하다.



사람들은 모두 파멸 후에 균형을 잡기 위해 나름의 광기를 필요로 한다. 그건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과 비슷하다. 광기가 세 번째 다리가 되는 것이다.


인생에서 의지할 것이라곤 꾸며낸 거짓말밖에 없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가난한 연금생활자들이 기르는 개에게 사 주는 가짜 뼈 같은.


스스로가 어떤 ‘종착지’ 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어깨를 마주댄다. 최악의 고통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마음을 다스려보지만 피로하고 또 피로하다. 힘을 가진 쪽은 또렷하지만 선악으로 재단되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어떤 종착지는 누구에게나 예고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독자일 뿐이고 이제 깨어났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라며 타자화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서있는 곳과의 거리를 가늠해본다. 나 또한 차지하고 있을 회피를 돌아보다 쓸쓸해지는 작품이다.



나의 개는 실외 배변을 했다. 출근 전, 퇴근 직후, 잠들 기 전 하루 세 번, 평생의 순둥이가 유일하게 세운 고집이기도 했지만 매번 어김없이 행복해해 안 따라줄 도리가 없었다. 특히 세 번째 산책 후엔 제 나름의 온전한 하루를 보냈다는 듯 득의양양 의심 없이 코를 골았다. 매일 되풀이되어도 새롭고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충만함이었다.

시간의 특정함은 같은 풍경을 완전히 다른 공기로 채운다. 달이 뜨면 뜬 대로, 안개비가 날리면 날리는 대로 우리가 느릿하게 흘려보내던 하루의 끄트머리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밤의 일과가 교차되었다. 알고 있었지만 굳이 생각해 보지 않는 그런 일과들이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폭설이 여전히 드세던 새벽, 염화칼슘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개는 고집을 피웠다. 싸리비로 염화칼슘 자리를 털어내 개 한 마리가 지나갈 작은 길을 파주던 환경 미화원분이 있었다. 언젠가 개의 나이를 묻고 지나친 분이었다. 바쁜 날 민폐로 느낄 수도 있었을 텐데 나이 든 개의 작은 일상을 기억해 도움을 내밀었다. 이제 눈이 내리면 어떤 설레임 보다도 그 밤의 공기가 환기된다.


새우튀김 하나가 색깔이 다르다며 집요한 폭언을 퍼부어 가게 주인을 뇌출혈로 내몬 뉴스를 봤다. 같은 회사의 물류창고에선 지난겨울 사람을 얼려 죽이더니 이번에는 태워 죽였다. 학내 노동자들에게 같잖은 쪽지시험을 시전 한 그 교수의 커리큘럼은 온전할까? 사람은 한 줄기 모욕으로도 죽을 수 있다.

곁눈질로만 봐도 한결같다는 점이 뉴스의 가장 끔찍한 점이다. 단 한 명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에 우리는 얼마나 익숙한가. 그런 이들은 징글징글하게도 살아있는데 어떤 이들은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죽어버린다. 노력이라는 허상으로 간신히 오늘을 버티는 이들에게 불공정한 편법으로 선두를 차지한 이가 공정을 논하고 앉았다. 성별도, 직업도 진즉에 계급이다. 사는 게 너무 비웃기고 슬프다. 이런 냉소마저 꽃놀이 같다.


대부분의 우리는 20여 분도 안 남은 산소통을 지고 화재 속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새우튀김 하나쯤은 흔쾌히 버릴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의식적으로 예의를 차린다. 그런 행위를 우리는 ‘사회화’라 불러왔지만 이해나 공감은 이제 감정이 아닌 지능의 문제처럼 느껴진다.

나의 노동으로 값을 치른 서비스에 죄책감을 가지고 싶지 않다. 나의 범상한 일과로 인해 누군가 피 흘리길 바라지 않는다. 분명 다수의 삶에 자국을 남기는 무거운 문장도 존재하겠지만 페이퍼 한 장이 땀 한 방울보다 무겁다고 여기지 않는다. 내 손에 묻지 않았다 해서 그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이 허랑한 세상에서 누구나, 언제든 속수무책일 수 있기에. 그런 다짐에도 대부분의 우리는 가해자로, 피해자로, 방관자로 뱅글뱅글 내몰린다.

당신의 밤으로 인해 어떤 날을 평온히 마무리할 수 있었듯, 나의 낮도 당신에게 지지가 되길 바라는데.





@출처/ 

King: A Street Story, John Berger, 1998

킹-거리의 이야기 (열화당, 2014, 번역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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