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잘 지내셨나요? 식탁 위에 놓여진 노란색 사탕을 보다가 교수님이 떠올랐어요. 그러다 문득 벌써 몇 번째 5월의 달력을 넘기는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이렇게나 걸릴 지 몰랐으니까요. 이 편지를 전달하기까지 억겹의 시간이 흘러 버리지 않기를 마음으로 바라 봅니다. 2007년 5월 15일, 이제 막 대학생이 되어 연구실을 찾아간 제게 교수님께서 그러셨어요. 찾아올거란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고. 다음에 올 때는 가볍게 놀러 오라고. 이렇게 비싼 꽃바구니 대신 사탕 한 봉지 사오면 된다고. 교수님 연구실에서 나오며 다짐했지요. 교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던 것을 꼭 한 번은 이루어야 나타나겠다고. 다시 올 때는 그 이야기와 함께 사탕 한 봉지를 품에 안고 오겠다고. 하지만 이렇게 편지를 전하지 못하고 쓰기만 하는 까닭은 15년이 지나도록 그 날의 결심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등학생이 되자 마자 저는 마감 시간에 시달렸어요.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저의 마감은 수능을 앞두고 있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지요. 소중한 사람을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강박,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손에 쥐고 있는 것 처럼 매순간의 불안함. 마음이 언제든 쾅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았어요. 당장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담임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저.. 자퇴를 하려고요." 선생님께서는 동그래진 눈으로 저를 올려다 보며 이유를 물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했습니다. "병원에서 그러는데 엄마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대요.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요." 몇 개월 전 까지만 해도 드라마 '내 사랑 삼순이'를 보겠다고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손바닥을 맞으면서도 "제가 규칙을 어긴거니까 맞아야지요." 하며 당당하던 제가 그 날 만큼은 어찌나 입이 안 떨어지고 목이 메이던지요.
아마 그 이후였을 겁니다. 선생님께서 교수님과 저의 만남을 주선하신것이. 정규수업이 없던 여름방학,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실 책상에 앉아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손짓으로 저를 교실 밖으로 부르셨는데, 이유도 알려주시지 않고 운동장 옆에 서 있는 차에 가보라고 하시더군요. 낡고 허름한 차에는 머리숱이 조금 부족하고 눈가에 주름이 진, 나이가 지긋한 어른이 앉아 계셨습니다. 네, 교수님이요.
교수님은 기억하시나요? 저는 아직 그 날을 잊지 못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잊지 못하겠지요. 그동안 어떻게 살아 오셨을 지 한 눈에 가늠이 되는 온화한 첫 인상. 대화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이어나가던 부드러운 목소리. 오래된 세단의 불규칙적인 에어컨 소리. 가고 싶은 학과를 물으시곤 천천히 캠퍼스 드라이브를 시켜주시던 차의 시트에서 느껴지던 진동. 서점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 지 몰라 쭈뼛쭈뼛 서 있던 저를 세워 놓고 골라 오신 다섯 권의 문제집. 동글동글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격려와 위로. 하얀 봉투에 가지런히 들어 있던 백 장의 녹색 지폐. 학교에 데려다 주시며 하셨던 말씀까지도요.
"도움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아직 미성년자고 학생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혹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눠보니 학생이 나중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런 생각이 든다면 나를 찾아와서 은혜를 갚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좋은 어른이 되어 다른 어린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길 바란다. 그럼 그 마음이 또 전해지고 전해져서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는 좀 더 나은 세상이 될 지도 모르겠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누워있는 엄마에게 봉투를 건네 드렸어요. 엄마는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셨어요. 단시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등학생을 키우고 병원을 다니느라 홀쭉해진 엄마의 통장엔 교수님이 주신 지폐보다 적은 숫자가 찍혀 있다고 했어요. 저는 그 날 이후 계속 교수님의 말씀들을 부적처럼 지니고 살았습니다. '교수님 말씀처럼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고 꼭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야지. 따뜻한 마음을 지닌 어른이 되어야지.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엄마가 세상을 떠나면 나도 따라 가려고 늘 가방에 면도칼을 가지고 다니던 저의 마음속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담임선생님과 교수님, 그리고 몸이 아픈 엄마를 생각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그냥 보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옷을 만들어 팔며 장사를 하느라 이미 망해버린 내신 성적을 어떡하나'하는 고민끝에 수능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학과에 진학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제일 못하던 수학은 수리 10-가부터 다시 시작해서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3학년 내 올백을 맞고 교과 성적 우수상을 받기도 했어요. 비록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학비가 저렴하고 집이 가까운 지방 국립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요.
참, 편지를 쓰다 보니 그 날도 떠오릅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등하교 시간이 아니면 버스운행이 되지 않아 버스를 타기 위해선 2km를 걸어야 했어요. 하루는 ㅇㅇ가 버스가 없는 시간이라 아빠차를 같이 타고 가자고 했어요. 그 때 '응'이란 대답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겠지요. 교수님께서 같은 반 친구 ㅇㅇ의 아버지셨다는 것을. 친구들 여럿이 함께 차를 탔는데 익숙한 얼굴의 아저씨가 운전석에 앉아 계셨어요. 교수님께서는 온화한 얼굴로 한 명, 한 명 이름을 물어 보셨어요. 제가 짧은 인사와 함께 이름을 말하자 "처음 보는 친구네. 반갑다."고 하셨지요. 아마 제가 교수님께 도움을 받은 것을 ㅇㅇ도 모르게 하시려고 그러셨나봐요.
졸업식 날에는 교수님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사 인사를 꼭 전하고 싶어 꽃다발을 들고 기다렸어요. 한참을 기다리다 ㅇㅇ에게서 교수님이 바빠서 못 오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저는 황급히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어떡하죠? 교수님이 안 오셔서 인사를 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교수님의 대학 후배이고, 제가 진학을 희망하던 지리교육과의 교수님이신걸 알려주셨습니다. 제가 자퇴 선언을 한 며칠 뒤 교수님께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연락이 왔는데 선생님께서 술 대신 장학금을 연결해 줄 수 없냐고 물어보셨던 거라고요. 선생님과 교수님이 안 계셨다면 저는 지금쯤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계속해서 인터넷에서 옷을 팔았을까요. 아니면 아무 학교나 졸업해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계획했던 것처럼 면도칼을 사용해서 생을 마감했을까요?
가끔 인스타그램으로 교수님의 소식을 듣곤 합니다. 벌써 퇴직을 하셨는지 ㅇㅇ의 손주를 돌보고 있는 사진이 올라 오더라구요. 제가 기억하는 모습 보다 훨씬 나이가 드셨지만 여전히 따뜻해 보이셨습니다. 참, 저의 소식은 아시나요? 대학교 1학년 때 교수님을 찾아 갔을 때 지리교육과로 전과를 할까 고민을 했었던 것 기억나시나요? 저는 고민 끝에 취업이 잘 되는 기존 학과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남들은 취업이 어렵다는데 저는 대기업에 3군데나 최종 합격을 했었어요. 그 중 한 회사에 7년쯤 다니다 몇 년 전에는 임용고시에 합격해 학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윤 추구가 제 일의 목표인 기업체와 달리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제가 학교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담임선생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꿈나르미(업무용 메신저)에서 교육청 소속 모두를 검색할 수 있단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하지만 선생님께선 퇴직하셨는지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질 않고, ㅇㅇ의 인스타그램 속 교수님 사진엔 주름이 하나 둘 씩 늘어 갑니다.
저는 또 다시 마감 시간에 쫓겨 마음만 조급해 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다짐했던 것 처럼 "나도 옛날에 누군가로부터 비슷한 도움을 받았단다. 혹시 네가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나중에 다른 아이들을 돕길 바란다. 그러면 앞으로 누군가의 세상이 조금 더 밝아지진 않을까"라는 말을 전하고 싶은데, 그래서 다시 교수님을 찾아 뵙고 싶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어른이 된 것일까요? 사탕은 열 봉지도 열 박스도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아직도 이 편지를 전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