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촬영지,몬탁에서 다시 마주한 이야기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조엘은 출근길에 갑자기 몬탁행 열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1월 어느 겨울날 나 역시 몬탁의 겨울 바다로 향했다. 충동적이었던 조엘의 행동과 달리 나의 몬탁행은 상당히 계획적이었다. 당시 프랑스 교환 학생이었던 나는 오로지 몬탁에 가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본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몬탁에 가보고싶어한다. “Meet me in Montauk.” 이라는 나지막한 클레멘타인의 음성 때문일까? 무의식이 이끄는 듯한 그곳, 몬탁에 다녀왔다.
장장 4시간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기차를 타고 뉴저지에서 출발해 맨해튼을 거쳐 몬탁역에 도착했다. 몬탁역 외관이 많이 바뀌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20년 전 영화 속 모습 그대로였다. 조엘과 클레멘타인, 두 주인공이 서로를 의식하던 그 장소 그대로. 이터널 선샤인의 상징이기도 한 몬탁 바닷가는 역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걸어가는 내내 오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상점들을 몇군데 발견했지만, ‘3월에 다시 만나자’는 팻말만 붙어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죄다 서핑용품을 파는 상점들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겨울의 몬탁은 비수기를 넘어 타지인이 굳이 가지 않는 곳이라는 걸. 아무것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며 허탈해했다.
좋아하는 영화의 촬영지에 간다는 생각으로 설레던 기분에 묻혀 잠시 영화 속 몬탁의 분위기를 잊고 있었나 보다. 한적한 바닷가, 구름 낀 흐린 날, 차분한 분위기. 모든 것이 두 주인공이 있던 배경과 똑같았다. ‘그래, 이게 이터널 선샤인의 분위기지.’하며 이내 만족했다.
저 멀리 주황색 후드티를 입고 파란색 머리를 휘날리던 클레멘타인이 보이는 듯했다. 영화의 타임라인을 이해하고 싶다면,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을 주목해보자. 초록색, 빨간색, 그리고 파란색까지. 그녀의 머리색은 감정의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 시간에 따라 감정의 온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연인 간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도 한때는 특별할 거라 믿었던 순간이 무색해지기도 한다. 서로가 무뎌져 가면서 감정의 온도가 식어가는 과정은 제법 슬프게 느껴진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식어가는 듯해도 감정의 온도는 다시 뜨거워질 수 있다. 그러니 미적지근한 감정을 유지하는 관계는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관계를 오래 유지할수록 감정은 다채로워진다. 미적지근하더라도 함께 해온 시간만큼 인연은 더 견고해질 것이다.
한적한 몬탁의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두 주인공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해 보았다. 클레멘타인은 미적지근한 관계를 견디지 못하고 라쿠나를 찾아갔다. 조엘에 대한 기억을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내린 선택이었을 것이다. 영화 ‘해피투게더’의 대사가 생각난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지난 기억을 없애고 정말로 다시 시작하게 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결국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까? 몬탁 여행을 끝마치면서 나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슬프고 아픈 기억은 유독 우리에게 깊이 그리고 오래 남는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감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안 좋았던 기억은 모두들 잊으라 말한다. 얼른 훌훌 털어버리고 좋은 것만 기억하자고. 그렇다면 영화 속 두 인물처럼 한때는 사랑했던 서로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는 일은 좋은 선택이었을까? 때로 힘들었던 기억은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우리를 주저앉게 하고 또 나아가게 하는 이 기억. 망각은 정말 신의 축복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