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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Jan 11. 2024

알베르 카뮈 [이방인] 8 끝

2024 매일 필사 첫 번째

결론적으로 사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또는 우리는 결코 우리가 짐작하는 범죄 때문에 유죄를 선고받지 않는다.


카뮈의 인생은 그 자체가 '이방인'의 삶이었다. 알제리의 프랑스인, 즉 '피에 누아르'로서 운명적으로 알제리에서나 프랑스에서나 뿌리 없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빈민이어서 이방인이었고, 집에서는 지식인이어서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카뮈에게 지중해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었다. 특히 알제의 바다와 태양, 즉 자연의 세계에서 그는 드물게 행복을 느꼈다. 


부조리란 논리적 설명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감성적 느낌의 대상이다. (...) 세계는 도덕과 배덕, 긍정과 부정, 고통과 기쁨, 광기와 이성 등 반대되는 두 행의 양립에 바탕을 둔다. 두 항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뫼르소는 사회가 요구하는 일종의 유희, 즉 거짓말하는 유희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형당했다는 것이다. 거짓을 질료로 삼는 사회적 유희, 즉 온갖 의례에 익숙한 법조인들은 실제 그대로의 진실만을 말하는 뫼르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살인할 의사는 없었지만, 살인이라는 결과는 있다. 이때 그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부조리 감성이란 이처럼 명쾌하게 결정할 수 없는 황당하고 애매한 상황에서 탄생한다.
부조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구경꾼들이 뫼르소를 더 증오하면 증오할수록 그의 죽음은 더욱더 부조리한 죽음이 되기 때문이다. (...) 어머니 장례식 이튿날 뫼르소가 바다를 찾는다는 사실은 원형적 무의식의 시각에서 지극히 자연스럽다. 프랑스어로 바다와 어머니는 음성학적으로 동일할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다는 인류의 영원한 모성적 자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 뫼르소의 살인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산물. 뫼르소는 아랍인이 아니라 태양과 대결한다. 태양이 뫼르소의 의식을 말살했을 때, 무의식이 그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방아쇠가 당겨진다. 그의 총구는 아랍인을 향해 있지만, 그의 무의식은 태양을 향해 있다. 그가 총성으로써 떨쳐버린 것은 아랍인이 아니라 '땀과 태양'이며, 깨뜨린 것은 '한낮의 균형', 즉 태양과 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행복한 결혼이다.


뫼르소가 사형당하는 진정한 이유는 살인이 아니라 기성질서와 고정관념의 위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방인]은 이해해 달라는 책이 아니라 의심해 달라는 책이다. 늘 익숙하고 안정된 세계가 돌연 나의 고향, 나의 왕국이 아니라는 느낌, 이 느낌을 얻는 자가 바로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 인간' 즉 '부조리를 의식하는 인간'일 것이다. 


[이방인]을 읽은 후 확신이 아니라 의심 속에서, 안정이 아니라 동요 속에서 자신의 근원적 이미지를 찾아 조용한 성찰의 여행을 떠나는 것, 그것은 곧 [이방인]을 정독했다는 뜻임이 틀림없다. 

[이방인]을 읽는 동안 항상 찝찝하며 알 수 없는 의문점들을 남겼었다. 알베르 카뮈의 철저한 의도 속에서 독서를 했다는 점에서 놀라우면서도 기막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가 싶으면서 성찰하고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책이라는 점에서 훌륭한 고전이라 할 만하다. 내가 갖고 있던 의문점들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완전히 풀리진 않았는데 해설을 읽으면서 대부분 해결되었다. 재독 할 때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꼭 다시 읽어보려 한다. 




2024년 필사의 첫 번째 책인 [이방인] 필사가 끝났습니다.

깊이 있는 독서를 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독려하며 꾸준히 이어갈 수 있다는 것도 좋았어요. 

앞으로 채워나갈 필사도 더욱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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