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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Jul 23. 2019

2019년 6월 : 우연의 신 (손보미)


1. 책을 고른 이유

순전히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냥 평일 연차휴가를 냈다. 올해 초부터 부서를 이동해서 적응하랴, 일 하랴 힘들었다. 그리고 몇 달간 남편 병원 외에는 휴가를 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온전히 날 위해 쉬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이 자기도 쉬겠다며 따라서 휴가를 내는 바람에 내가 생각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평일의 휴가라 좋았다.


그 날엔 내가 가고 싶었던 책방에 갔다. 이상하게 책방에 가면 꼭 책을 사게 된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이라기보다 그 날 보고 끌리는 것을 고른다. 끌리는 것이 딱히 없을 때도 많지만 그럴 때도 어떻게든 한 권은 사 오는 편이다. 마치 기념품처럼.


우선 이 책은 “우연의 신”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표지가 예뻤고, 책이 가벼웠고, 맨 뒤에 적혀있던 “우연과 우연 이후 인간의 삶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에 의해 계속 변화하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이 책의 마케팅이 완벽히 성공한 것 같다.


2. 읽으면서,

이 책을 읽던 때에 회사에서 회식이 있었다. 술을 마시며 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예전에 대학생 때 동기의 생일주를 만든다고 친구들이 신발인지 양말인지를 술에 담갔던 것을 기억해서 말했고 모두가 경악을 했다. (물론 마시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만든 것은 진짜다...) 그러다 우리 본부의 본부장이 본인이 카투사 시절에, 그러니까 아마도 20여 년 전, 사발에 위스키, 맥주, 수박을 섞어서 화채처럼 먹는 것을 미군들에게 배웠다고 했다. 무려 그 위스키는 조니워커라고 했다.


조니워커는 이 책에 나온다. 생산이 금방 중단된 비운의 조니워커 화이트라벨이 세상에 딱 한 병 남아있었고, 누군가가 그것의 회수를 주인공에게 의뢰하면서 소설은 전개된다. 프랑스로 떠난 남자와 어쩌다 그 조니워커 화이트라벨을 가지게 된, 여자의 이야기이다.


회식에서 조니워커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런 우연이! 하면서 혼자 깜짝 놀랐다. 물론 거기서 조니워커가 핵심은 아니었지만...



3. 읽고 나서,

우연한 상황이 여러 번 펼쳐진다. 이런 우연이면 운명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연이라고 하면 그냥 어쩌다 일어나는 일들 같다. 그래서 내가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는 느낌이었다.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 어디론가 숨고 싶었는데 숨을 곳이 없는 그곳은 지하철역 플랫폼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단어인 운명이라고 하면, 사주팔자처럼 태어날 때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정해진 느낌이다. 운명에 비하면 우연은 운신의 폭이 조금 있다.


우연들 속에서 인물들의 주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남자는 계획되어 있던 휴가를, 의뢰가 들어온 업무를 자기도 모르게, 프로이트 식으로 하면 무의식에서 그렇게 하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러한 계획들을 뒤로하고 여자를 따라 기차를 타고, 맨해튼에 있다는 개를 맡아주려 한다. 여자는 무기력하게 살고 있고, 전에 살던 파리로는 가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또 어쩌다 보니 맨해튼의 개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맡기고, 짐도 모두 호텔에 둔 채로 파리로 떠나려 한다. 책 말미에 나온 것처럼 조니워커 화이트 라벨 마지막 병도 여기저기로 떠돌 테고, 여자도 남자도, 또 그 술과 연관된 사람들 모두 여기저기로 떠돌 것이다. 우연처럼 다시 만날 것이고 또 우연처럼 다시 헤어질 것이다. 우연 속에는 미약하게나마 의지가 있다. 그러니까 우연 자체가 의지를 가지고 어떠한 방향으로 흐른다.



잃어버린 걸 찾겠다고? 삶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아. 그냥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못했을 뿐이야. 주어지지 않은 거지. 세상에, 그는 그 순간 자신이 다름 아닌 바로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언제나 리-프레쉬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었다. 병 속의 물이 점점 차올라서 ‘포화 상태’에 다다르기 전에 병을 비워버리는 거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제껏 무언가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텅 비어 있는 병 속에 무언가 점점 차오르는 그런 것과는 달랐다. 병 속이 비워져 있는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언제나 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제는 병 속의 물이 언제나 균형을 맞출 수 있느냐는 거였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딱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러니까, 그건 단 한 방울과 관련된 문제였다. 단 한 방울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었다.

우연의 신 (손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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