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포터 지음)
1. 책을 고른 이유
단순하다. 책을 선물 받았다. 그래서 읽었다.
책 선물은 특별하다. 책을 받은 사람은 이건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을 느낀다. 나를 생각하며 골랐을 테고, 다른 어떤 물건보다도 책은 그걸 어떤 상황에서 읽었는지, 또 읽는 사람의 성향이 어떤지에 따라 감상은 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커다란 선물이 될 수 있다.
2. 책을 읽으면서
7월이 되니 밤에도 덥다. 분명 몇 주 전만 해도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해서 좋았는데. 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초여름은 끝났다. 그리고 본격적인 여름이 되었다.
책의 이야기들에 여러 가지 여름이 나온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계절적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는 한국, 책 속은 미국이다. 그러다 보니 공간적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버지니아는 가뭄철이다. 이 주째 비가 오지 않았고, 기온은 세 자리 숫자를 기록했으며 저녁이 되어도 화씨 105도 (섭씨 40.5도)에 머무를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늦은 오후의 공기는 투명하고 가볍고 아주 얇아서 마치 그 속을 움직여 다니는 것이 느껴질 정도이고, 눈을 찡그려 뜨면 쇄석 진입로 위로 물결치듯 솟아오르는 열기가 보일 듯하다.” <구멍>
“그해 여름의 저녁에는, 간혹 인근 언덕 지대에서 코요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중략 - 녀석들은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이 되어 해가 거리 저편으로 떨어지고 나면 멀리서 개들처럼 우짖었다. 뒤뜰의 잔디 너머로,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어두운 태양과 요트 정박지에 있는 자그마한 집들의 불빛들이 보였다. 나는 내 유년의 모든 때를 그 지붕에서 보냈을 것이다. 바다를 내다보면서, 충분히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뭔가 의미심장한 발견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코요테>
나의 대학생 때 여름방학 이야기.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던 날들이 있었다. 누워서 뒹굴 뒹굴 책 읽고, 미국 드라마 다운로드하여서 밤 새 보고, 선풍기 켜 놓고 바닥에 누워 있다가 잠들고. 그때만 해도 이렇게 덥지 않았던 것 같은데. 회사 다니는 지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그때가 참 그립다. 과거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나는 저 때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으니까 슬프다. 생생하게 기억나지만 전혀 생생하지 않고 빛바랜 느낌이다.
책에서 주인공들은 과거 여름을 회상한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는 사실들이 있다. <코요테>의 주인공이 부모님에 대해서 느낀 것이 그렇다. 그때 보고 느낀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도 주인공이 교수인 로버트와 덤덤하게 헤어진 것 같지만, 실은 어느 날 밤, 오지 않는 로버트를 기다리다가 실망을 했던 일이 있었다. <폭풍>의 누나는 남자 친구를 같이 간 여행에서 버리고 왔다고 했는데, 사실은 남자 친구가 자기를 떠난 것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실토한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고, 보고자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때 그 일들이 있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고,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 덕분에 현재가 변하는 일도 없다. 그 순간들은 영원히 박제되어서 시간이 흐르면서 먼지가 쌓이고 빛을 잃어가는 것이다.
3. 책을 읽고 나서
과거의 한 여름을 회상하면 열기가 다 식은 후의 싸한 느낌이 든다. 분명 그때는 무척 덥고 고군분투하였는데.
내가 생각하는 가장 더운 여름은 혼자 살던 시절 좁은 방 안에서였다. 회사와 집이 멀어서 시에서 지원해주는 여성 근로자 임대아파트 (왜 남성 근로자를 위한 곳은 없었을까?)에서 살던 시절. 그곳은 룸메이트 1명과 방 2개짜리 집을 공유하는 시스템이었다. 각자 방이 있고 화장실과 부엌, 작은 거실을 같이 쓴다. 나는 그곳에서 결혼하기 전까지 5년을 살았다. 물론 집이 아주 멀지는 않아서 주말에는 원래 집에 가 있기는 했지만, 월요일 출근을 위해 일요일 오후 그 방(집이라고 부르기 어렵다...)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갈 때면 늙어버린 것 같아서 서글펐다.
처음 들어갔을 때 룸메이트 언니가 여기는 공기가 안 좋아서 (주변에 공단이 있어서라고 함) 창문을 열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파트는 시의 자산이기 때문에 에어컨을 마음대로 달 수 없었고, 거실은 같이 쓰는 공간이라 문을 다 열어놓을 수도 없었다. 즉, 베란다에 연결된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트는 수 밖에는 없었는데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열대야 속에서는 잠을 자는 건지 누워서 땀을 흘리는 것인지. 그런 날은 제대로 잘 수 없어서 아침에 눈을 뜰 때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시원한 공기가 느껴지면, 아 이제 여름은 다 지나갔구나 하는 이상한 안도감과 이상한 슬픔이 느껴졌다. 여름을 겪을 때는 덥고 지치고 지긋지긋한데 여름이 끝나면 한 해가 다 지나간 것 같은 허탈하고 슬픈 마음이 든다.
아직 여름은 끝나지 않았다. 슬픈 순간은 또 올 테니까 지긋지긋 하지만 이번 여름도 잘 만끽해야겠다.
(쓰고 보니 책 속의 여름과 나의 현실 여름은 다르다. 우리나라 여름은 엄청 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