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과 햇, 열매가 사는 모습
동서고금의 여러 선생님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다. 지금까지 잘 살아온 건지, 퇴보하고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에게 무엇이었는지… 이런 생각들에 꿈틀, 움찔하며 어딘가 멍든 것 같이 아플 때가 있다.
뜬금없이 날아온 화두가 마음 중심에 꽂히면 그 충격은 화살보다 더 세다. 정신이 들고 나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고, 얼른 뭘 해야겠다 싶은 조바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내 잊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무심히 살기도 한다.
돌아보건대 청년까지는 덤비듯, 숙제하듯 살았다. 중년인 지금은 ‘얼마나 생산적이었는지’ 생각해보는 잠시 멈춤의 시간들이 늘어난다. 노년기는 어떨까? 종합, 통합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는데, 정말 나도 그럴까? 생각대로 정리는 되기나 할까?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요즘 TV에서 자막으로 자주 등장하는 ‘멘붕’ 멘트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라도 들기나 한다면 다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처럼, 뭐가 어쨌든 ‘나’의 존재는 최소한 확인이라도 되기에.
문제는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가고 있을 때가 아닌가. ‘나’가 방향을 잃고 방치될 때 사람은 공중으로 붕 떠올라 화살로 변신한다. 남은 인생의 시간을 건너 죽음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 화살. 무섭지 않나? 나도 무섭다. 그래서 이 문제는 그때그때 해결 좀 하며 살아야 한다.
그 유명한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나날이, 매 순간 선택의 상황에 직면한다. 선택하고 나면 몇 개로 보였던 갈래 길은 하나의 외길이 된다. 외길이라고 해서 저 앞 모퉁이를 돌 때까지, 언덕을 넘어설 때까지 다음 풍경을 알지는 못한다. 외길도 처음 가는 길이기에 낯설고 부담인 건 마찬가지다.
이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가 좋았느냐 안 좋았느냐가 아니다. ‘내가 스스로 한 게 맞느냐’다. 만약 주체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했다면 그 선택은 무조건 잘 한 것이고, 결과가 무엇이든 온전한 내 것이다. 삶에 대하여 책임과 권한을 모두 갖게 된다. 그리고 세상살이에서는 자유인이다. 자신의 삶을 주도할 때의 모습이다.
물론 우리는 주도하는 삶 속에서도 후회를 피하지는 못한다. 세상살이에서 마음 같지 않은 일을 만나는 건 일상다반사요,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때는 왜 그랬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후회의 주체요, 원인이 다름 아닌 ‘나’라는 것이 서글프고 아쉽다. 그때 그 상황에서 미숙함과 부족함, 불완전함, 모호함, 무지함을 종합세트로 드러낸 것도 창피하고 답답하다.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후회에도 길이 있다. 진심어린 ‘반성’을 통해 전화위복이 된다. 성장의 도구가 된다. 다만, 못된 짓과 나쁜 짓을 양심도 없이 ‘반복’하는 것, 그것만 피하면 된다.
주체적으로 살고, 후회를 이겨내기로 한 현재의 삶은 그 자체로 ‘복’이다. 과거나 미래의 것과 대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진행형’이라는 거다. 우리는 지금도 계속 변모하고 있다. 신체의 성장이 끝난 후에도 마음은 자란다. 선생님들 말씀처럼 죽을 때까지 자란다. 오직 사람만이 성격의 딱딱한 틀을 벗겨낼 수도, 바꿀 수도 있다. 깊이와 넓이를 조정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기회가 있고 희망이 있다.
미래로부터 넘겨받은 ‘오늘’. 한 꾸러미의 시간을 받아들고 보면 늘 새롭다. 그렇기에 삶은 늘 ‘풋’과 ‘햇’의 모습이다. 두 단어는 모양은 많이 닮았는데 의미는 살짝 다르다. ‘풋’은 ‘처음 나온’, ‘덜 익은’의 뜻이고, ‘햇’은 ‘그해에 난’이라는 뜻이다. 열매 맺으려면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다. 처음 나온 게 덜 익은 건 당연하다. 여기서 그간의 ‘못난’ 나를 용서하고 자유를 얻을 모티브를 얻을 수 있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를 거치지 않고 성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랜 수련과 실습을 거치지 않고 장인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런 순서를 거치고 풍부한 경륜을 갖췄다고 해도 우리가 맞이하고 겪는 오늘은 난생 ‘처음’이다. 더없이 신선하고 새롭다.
그래서 늘 풋내 나는 서툰 꼴이지만 우리는 뻔뻔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내 인생 가지에 무언가 열려 있고, 분명히 익어가는 중임은 분명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햇복’을 찾고 만들어 누릴 수 있는 하루를 열 수 있다. 세상을 향해 ‘열린’ 멋진 모습으로.
다이어트에 2주째 신경 쓰고 있는 M양. 평소보다 덜 먹고 군것질도 참았건만, 체중에 변화가 없다. 함께 밥 먹는 자리에서 예쁘게 성토한다.
“몇 그램이라도 줄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그냥 그대로냐고요!”
마침, 그날 아침방송에서 주워들은 얘기가 생각나서 이렇게 위로해줬다.
“당장 변화가 없는 듯해도 사실은 큰 변화가 시작된 거래요. 살찌려는 방향으로 맞춰져 있는 신체의 화살표가 빠지려는 방향으로 바뀐 건 분명하다네요. 정반대 상황이잖아요.”
성장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을 가졌다면 위와 같은 상황과 다름없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화살표가 성장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있다면 이미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머뭇거리고 버벅거리며, 실수하고 오해하며, 상처받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가슴으로 살고 있더라도 우리는 분명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애정과 시간과 노력이 좀 필요하다. 단번에, 또는 5분 안에는 할 수 있는 건 ‘결단’이고 거기서 새 역사는 늘 시작된다.
죽을 때까지 자라려면 천천히, 힘차게, 흐르는 강물처럼 살자. 남달라야 한다는 강박으로, 옆 강물과 비교할 이유도 없다. 이 외길을 잘 흐르고 흘러 바다까지 똑바로 가면 된다. 사람의 영혼은 ‘진심’, ‘정직’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이것들은 모두가 동일하게 스스로를 사랑할 때 발현되는 힘이다. 자, 이제 그만 일어서자. 함께 가자. 한 걸음이라도 내가 가야 간 것이다. 작은 변화 하나라도 내가 해야 한 것이다. 구경한 얘기, 이제 그만 좀 하자. 오늘 하루, 목욕탕에서 갓 나온 듯 풋풋, 뽀송한 ‘나’가 그럴 일 아니다. 그럴만한 시간도 없다. 나는 여기에 존재해 있고, 여기를 사는 이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