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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명찬 Apr 07. 2018

위쪽으로 떨어지다(Falling Upward)

리처드 로어의 책


1. 책 ‘밖’에서    


종종 강연자로 초대를 받는다. 내게 무언가를 ‘듣고’ 싶은 분들이 있다니 귀하고 신기한 일이다. 만나는 이들은 분야, 업종면에서 다양하다. 기업, 기관, 단체, 대학, 고교, 독서모임 등등. 왠간하면 전국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다닌다. ‘뜻밖의 소풍’에 감사해서 나름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간다. 다양한 시선과 관점의 이야기를 하지만 큰 주제는 늘 ‘인생’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모두는 현재를 사는 동시에 다가올 미래에 관심이 크다. 뭐, 당연한 일이다. 지금의 다음이기에. 게다가 스스로가 제일 잘 안다. 나의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듯이 미래도 그러할 것.   

 

내가 펼치는 이야기 역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뼈아픈 경험이 중심에 있다. 몇 해 전, 중년으로 들어서다 죽음의 문턱을 밟고 ‘저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넘어진 일. 어안이 벙벙한 물고기 얼굴로 그 동안 안 해본 생각을 뻐끔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도로 표현하면 적절할까. 골치 아픈 상황은 그 이후였다. 죽거나 별 장애를 얻지 않은 것에 감사한 다음, 나머지 인생을 ‘덤’이라고 선언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단순명쾌한가.     


그러나 나는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 게다가 마음경영 컨설턴트니, 심리상담전문가니 하는 타이틀을 업으로 여태 살아온 사람이다. 가뜩이나 생각 복잡한 사람이 깨졌다가 다시 붙은 머리로 생각했으니! 어찌 앎의 해체와 통합이 동시에, 두서없이 일어나며 브레인이 스토밍 되지 않았으랴.     


그래서 내내 묻곤 했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 충실한가요?

  그게 당신의 시선과 관점이 맞나요?

  바람직한 인생기를 살고 있나요?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 당신들에게 한 수 가르쳐 드리지, 하는 덜떨어진 질문일까. 목마른 우물가의 여인의 마음, ‘진실로(verily)’를 물으시던 예수님 마음이 공감으로 뒤섞인... 그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원초적 질문. 나에게 묻고, 또 당신들에게 묻곤 했다.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묻게 될 것 같고. 그럼, 답은?    


답에 관한 이야기는 녹록치 않아 일단 넘겨둔다. 어려서부터 배운 거,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바람직한 것들, 원칙과 법칙, 진리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행위는 그냥 단순 반응일 뿐이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도 ‘다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의 답은 원래 그런 형태가 아니지 않은가. 삶의 내러티브(narrative)는 현실감 있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의 절박한 목표는 추상성의 제거라는 생각. 자신에게서, 자신의 주변에게서.    



2. 책 ‘속’으로


인생 후반전을 이야기한 자기계발 성향의 책들은 많다. ‘잘 살자(live happily)’ 내지는 ‘잘살자(be rich)’는 거, 거의 비슷비슷하지 않나. 목표는 독자의 뜨거운 동기부여. 그것을 이끌어내기만 한다면 작가의 의도는 일단 성공했다고 보아도  다. 그 ‘다음’이야 두고두고 독자의 몫이다.    


책 ‘위쪽으로 떨어지다(Falling Upward)’는 그런 면에서는 이유가 분명한 책이다. M. 스캇펙의 표현으로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고 이 책의 작가인 리처드 로어의 표현으로라면 ‘더 먼 여정으로의 초대’다. ‘인생의 후반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부제는 전반부의 인생을 살아낸 사람들을 향한 직설적인 질문이다. 책 제목대로라면 이 모험과 여정의 본질은 중력도 도무지 문제될 것 없는 신비요 미스터리다.     


사람은 오전 인생의 프로그램으로 오후 인생을 살 수 없다. 아침에 위대하던 것이 저녁에는 시시한 것으로 되고, 아침에 진짜이던 것이 저녁에는 가짜로 바뀌기 때문이다. - 칼 융    


해체와 통합의 울렁거림이 솟아오르면서 생각 구름이 몰려온다.

그래, 후반부의 모험과 여정 속에 있는 나는 무엇으로 잘 살 것이고 잘살 것인가.    


늙은이들은 탐험가가 되어야 한다.

여기냐 저기냐는 문제 아니다.

다른 합일, 더 깊은 교제를 위하여,

우리는 고요해야 하고,

다른 격렬함으로, 고요히 들어가야 한다.

 - T.S. 엘리엇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넘어 우리는 다시 초대를 받을 필요가 있거니와, 그것이 우리를 ‘두번째 순진함(second naively)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것은 첫 번째 순진함의 기쁨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전혀 새롭고 포용적이고 성숙한 사고방식이다.

 - 폴 리꿰르    


내 울렁거림이 투영되고 정체가 드러나는 것 같다. 해체로부터는 소멸 에너지가, 통합으로부터는 생성 에너지가 교차를 거듭하며 작동중인 게다. 구름들이 겹겹이 모인 후 멈춰 내리는 눈과 비랄까. 그렇다면 피부에 와 닿는 물기, 차가운 느낌이 현실이다. 끊이지 않는 모호함, 추상성을 극복하고 ‘생生’의 작동活을 비로소 확인하는! 이 세상이 내게 “살아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죽어 있고, 죽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하지 않니?(책 '피로사회'에서 덥석 가져온 표현.)”하며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해도.


전반부 인생에서 복음이나 지혜로운 사고방식을 몸으로 체득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조직'과 '정답'에 몸을 의탁한다. 그리고 그 '답 없는 것들'을 중심으로 인생의 탑을 쌓는 것이다.

   :

인생의 전반부의 임무는 자기 인생을 위하여 적절한 ‘컨테이너’를 만드는 것이고 인생 후반부의 임무는 그 컨테이너에 담아서 운반하기로 되어 있는 내용물을 찾는 것이다.     

   :

기본적으로 인생의 전반부 인생은 본문을 쓰고 후반부 인생은 그에 대한 주석을 쓴다.

   :

인생 전반전에서 생존의 춤(survival dance)을 췄다면 인생 후반전에는 성스러운 춤(sacred dance)을 춰야 한다.     

   :

"어떻게 전반부 인생의 합법적 요구들을 존중하면서 후반부 인생을 위한 공간, 전망, 시간, 은총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 긴장을 잘 유지하는데 지혜의 묘미가 있다.

   :

당신이 물어야 하는 유일한 의미 있는 질문은 "누가 그래?""언제 어디서 누가 그랬어?""성경이 또는 교황이 그렇게 말했어?" 따위가 아니라 "그거 진실이야(Is it true?)"다. 유일하게  의미 있고 도움이 되고 겸손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진실인가?"


인생 후반기를 사는 태도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생 전반기를 완성한 사람이 후반기로 나아갈 기회를 얻는 게 아님에도 전반기 활약이 찜찜한 사람들이 후반기로 나아갈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와 닿는다. 집이나 별장도 아닌 컨테이너 하나라고 해도 공짜로 얻을 곳이 있던가. 누군들 근사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는 하루를 살까. 이 땅의 삶은 '먹고 삶'의 테두리가 보이다 안보이다가 해서 눈을 부비곤하는데. 하늘 지향의 삶은 버겁기만 하고 사실은 그걸 누구도 쉽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누구의 평가인가.   


책 ‘위쪽으로 떨어지다’는 순수, 신선함, 그리고 자유가 평온하게 하늘하늘 흩날리며 인사이트를 주는 책이다. 봄꽃이 바람에 꽃잎 날리듯 말이다. 가슴으로 떨어졌다 머리로 떨어졌다가 하면서. 바람직한 삶이 뭔지 몰랐는데 이제야 배웠네 하고 무릎치고서는 잘 잊어버릴 수순을 밟게 만들지는 않을 것 같다. 앞서 표현한 것처럼 당위에의 동의, 공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나'를 살아내고 있느냐를 따지는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구경한 것'과 '겪은 것'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기에.

이미 위쪽으로 떨어져서 진행중인 후반전의 삶은 위아래냐, 중간이냐에 목숨 걸 겨를이 없다. 어느 타이밍에 맞춰 진입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겪고' 있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냥 받아들이고 숨을 고르고 의젓하고 솔직하게 살아낼 뿐이다. 그렇게 중년을 거쳐 노년으로, 또는 그 다음으로 이행하는 삶을 살아낼 뿐이다. 하물며 그것을 부인하고 전반부에 머무르려 한다면 흐지부지 퇴행의 날들을 면치 못할 것이다. 후반부를 여전한 안개, 전반부의 그림자처럼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3. ‘사이’ 생각 


작가 리처드 로어는 43년생으로, 중년인 내게는 거의 아버지뻘인 영성학자다. 이 책은 이를테면 '영성계발서'라고 할 수 있겠다. 신비한 영적 체험이라는 거, 오래 전 경험했으나 지금은 딱,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와 같은 느낌이다. 영적 체험이란 신비한 것이 틀림없지만, 신비함이 무슨 프리즘처럼 쏟아져 나오는 무지개빛 같은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린아이 발상이다. 작가 역시 어디 한 줄 유치한 표현이나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그의 문장들은 참 구구절절 깊다. 와 닿는 대로 몇 개 골라 여기에 나열하는 게 무의미하다 할 만큼 기막히고 아름답다. 거기에서 빛이 흘러나온다. 


M.스캇펙에게 예전에 동의했던 ‘죽을 때까지 성장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람의 정의를 리처드 로어는 “그 동의, 아직 유효하지?”하고 내게 묻는다. 당연하지. 계속 학습하지 않으면 짐승의 수준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존재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던 우주 최대의 이벤트의 이유지. 그래서 '위쪽으로 떨어짐'에 흔쾌히 동의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통찰 후에 오는 극적인 전환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다.  


 중력의 법칙이란 실로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지극히 작은 물건조차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저 큰 바다처럼…

 이것은 사물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르침이다.

 떨어지라고,

 내 무게를 참을성 있게 신뢰하라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책 곳곳의 도입부분에 등장하는 선수(?)들의 글은 작가의 마음에서 작동한 후 후반기를 사는 사람들을 위해, 영혼을 통째로 흔들기 위해 작정하고 다가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옥같은 글들은 이미 위쪽으로 떨어진 채 살고 있는 삶은 중력 무시의 삶이 아니라고, 그리고 이제는 ‘깊은 곳’으로 뛰어들 차례라고, 다음의 ‘충만’을 위해서는 꼭 그래야만 한다고 차근차근 알려준다.


이 경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크고 놀라운 일들 가운데 하나가 당신 스스로 홀로 있음(solitude)이 당신의 외로움(lonliness)을 치유한다는 사실이다.

   :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오르막 내리막으로, 옳고 그름으로, 내편 네 편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 있는 건 그냥 있는 거다. 이 고요함이 당신으로 하여금 훨씬 명료한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자세가 완전히 피동적이가만 한 것은 아니다. 사실은 참된 묵상과 세련된 행동 사이의 본질적 연결고리다.

   :

삶의 진실이 제 언어로 당신을 가르치지 않는 한, 당신의 이원론적 사고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련을 하지 않는 한, 당신은 대부분 사람들이 그래왔듯이 언제까지나 전반부 인생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어안이 벙벙 두리번거리는 거, 이 나이라면 멈출 때도 됐지, 싶기도 하다. 이제는 좀 의젓하게 갈 길 좀 가야 하겠기에, 한번 깨진 머리로 액땜하고 퉁친(?) 자유를 얻어낸 상황도 아니기에, 날개를 펼치고 어른의 길을 가려면 알의 모습은 그만 벗어나야 하겠기에.

아니아니, 이런저런 말 다 필요 없겠다. 이 후반전 한 복판에 나를 위한 춤판, 한번 원 없이 펼쳐보고 끝냄이 마땅하지 않을까. 후반전을 꽉 채우고 나서 그 다음으로 다리를 놓을 만큼, 빛을 뿜으면서 말이다. 바로 딛고 제대로 위쪽으로 떨어졌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단 한 번 뿐인 인생, 나는 갈망하기로 한다. 더 복잡하고 큰 모험에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려 한다.


당신은 분명하게 갈망하라.

깊이 갈망하라.

당신 자신을 갈망하라.

하나님을 갈망하라.

모든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을 갈망하라.

모든 '비워냄'(emptying out)은 오직 '큰 쏟아져 나옴'(a Great Outpouring)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이 그렇듯이, 모든 공백들을 싫어하여 급히 그것을 채우신다.


컬러로 처리된 모든 구절들은 책 <위쪽으로 떨어지다>의 글을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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