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가르쳐 준 방법 쓰기
깊은 숲 속, 토끼 한 마리가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끼는 맥없이 잡히고 만다. 토끼가 잡힌 건 힘과 스피드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흥!”하고 포효하며 달려드는 호랑이에게 압도되어 그만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렇다. 예기치 못한 큰 일 앞에서는 그저 당황스럽다. 판단은 중지되고, 몸은 바싹 움츠러든다. 게다가 사람은 생각만으로 공포를 더욱 키워내는 재주도 있다. 심리적 부담은 순식간에 신체적으로 전이된다. 위축된 채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한숨에, 낙담이 크다. 짓눌림은 가중되고 그 마음은 다시 몸으로 옮겨져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꼬락서니. ‘심신일여心身一如’ 같은 표현을 이런 악순환의 상황에 떠올리게 되는 난감함이라니.
격려, 위로, 도움...그 무엇도 당장은 와 닿지 않는다. “Why not? You can!”류의 비자발적 메시지라든지, “뭘 그 정도 가지고...내가 겪은 거에 비하면...”류의 어설픈 위로라도 들으면 벌컥, 왈칵 화가 치밀기까지 한다. 이런 식으로 몸과 마음을 뒤덮은 얼음은 좀체 깨지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얼음은 녹아야 사라진다. 그리고 얼음을 녹이려면 ‘얼음’임을 인정하고, 녹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애써 녹이고, 녹아내린 것이 말라 없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시간이 필요하다.
‘얼음’일 때에는 생각과 행동이 유연하거나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냥 딱딱하고 멍청하다. 얼음 상황이니 웃어도 ‘냉소’가 된다. 삐딱해진 자신을 볼 때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하는 마음에 서글프다. 세상살이, 대인관계에서도 삐거덕거린다. 평소 문제되지 않던 일도 예민하게 달리 받아들이기도 하고 과한 자기방어로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 약해진 마음에 누군가라도 의지하려 들면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서먹해지거나 틀어지기 쉽다.
입장을 바꿔보면 그들은 어쨌든 ‘나’가 아니다. ‘남’같은 느낌에 서운해도 할 수 없다. “다 털어놔 봐!”하는 고마운 사람이 있다 해도 결국 해결할 이는 오직 ‘나’ 뿐이다. 그들은 한 핏줄이 아닐진대 당신을 위한 해결사로 나서줄 리 없다. 그걸 기대해서도 안 된다. 독하게 말해서 당신 사연이 기막히면 기막힐수록 그들은 그런 일을 겪은 이가 자신이 아니어서 감사하고, 심지어 ‘상대적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원치 않는 소문은 이미 천리 밖을 지나가고 있다. 어이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그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당신도 예전에 그랬다.
그래도 의지할만한 사람을 찾아다니겠다면 같은 이야기(=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그 이야기!)의 반복을 감수해야 한다. 잠깐, 생각해보자. ‘겪은 사실’은 단 한 번이다. 그런데 이 얘기를 여기저기 다니며 계속 복제 양산하고 싶은가. 소문은 그들이 아니라 당신이 내고 있다. 이 상황은 혼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회한이 들고, 자꾸 생각나고, 되새길 때마다 생각해보라. 역시 사실은 ‘단 한 번’이었다. 그것이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계속 일어나는 중’이라면 사람이 이후의 미래를 어찌 건강히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얼음의 모습일 때마저도 ‘잘’ 살아내야 한다. 여기에도 적절히 필요한 태도와 순서가 있음은 물론이다. 가장 먼저 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걸러내고, 무엇에 대해 단호히 거절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해져야 한다. 덮으려, 가리려 드는 순간 그 사건, 그 일은 당신의 무의식으로 내려가 미래 어느 때의 늪, 덫이 된다. 사실을 왜곡하려 들지도 말아야 한다.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가해자’의 위치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그러면서 당신도 고통스럽다. 이를 피하기 위해 자기합리화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뼈저리게 반성하고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결단해야 한다.
‘얼음’ 상황에도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당장 견디기 힘들어 억지로 끊어내려, 건너뛰려 하지는 말자. 이 때 섣불리 해석하려들 일은 아니다. 아무 의미 없다. 충분히 아파하고 슬퍼하자. ‘애도 기간’이 꼭 필요하다. 이 시간은 충분히 쉬면서 이리저리 생각도 하고, 반대로 멍 때리기도 하고, 안 하던 정리도 하고, 안 가본 곳도 가고 하면서 마음이 내는 길을 따라가 보는 시간이다. 그러는 중에 ‘내면의 나’가 ‘얼음인 나’에게 가만히 말을 걸어올 때까지, 듣다보니 눈물도 나고 이내 스르르 녹아내릴 때까지 지내는 것이 좋다. 애도기간을 넉넉히 갖지 않으면 슬픔은 길게 오래간다. 시시때때로 솟구쳐 당신의 기운을 빼놓을 거다.
한 평생 사는 동안 누구나 ‘얼음’이 되는 순간을 여기저기에서 맞곤 한다. 당신과 나, 앞으로 얼마나 많은 ‘얼음’의 순간을 맞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얼음!” 다음에는 “땡!”하는 순간도 맞이하게 된다. 그때, 알게 될 거다. 당신이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너스 선물도 기다린다. ‘한층 성장한 의젓한 모습의 당신’이 선물이다. 이후의 삶도 더욱 풍성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다. 그래서 고통의 시간이 찾아와도 꿀릴 것 없다. 많이 힘들고 슬퍼하고 쉰 다음, 잘 먹고 잘 자고 체력도 길러 당신의 몸과 마음을 선순환 구조로 바꾸는 시간으로 탈바꿈시켜 놓기로 하자. 그러면 된다. 돌파, 우회, 멈춤, 포기, 후퇴가 뒤섞여 돌아가더라도 한숨을 섞지 말자. 잘해내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얼음’ 다음의 상황인 것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람은 영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신앙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 절대자는 인생이 아니어서 다른 일로 바쁘거나 당신이 부담스러워 피할 리 없다. 당신의 고통, 아픔, 실패, 실수를 소문내지도 않고 당신이 다가올 때 까다로운 심사절차 없이 흔쾌히 해결사를 자청한다. 그렇게 신은 신다운 역할을 하듯, 당신도 삶의 전 영역과 전 구간에서 마땅한 당신다운 역할을 다하는 게 인생의 ‘평범하기도 하고 비범하기도 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군인들은 평상시에도 전시 같이 훈련을 거듭한다. 총알이 귓전을 스쳐가고 옆에서 폭탄이 터질 때 얼어붙지 않고 용감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다. 고통을 대비해서 이런 일상을 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이만한 준비라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내가 발명한 게 아니고 신이 가르쳐 준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