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lorasee 플로라씨
Oct 25. 2020
문득 두려움이 훅- 밀려드는 때가 있다.
손은 쉼없이 바쁜데 머리가 쉴 때,
지금처럼 깰거라 예상못한 순간에 눈이 떠지고 다시 잠들지 못할 때.
저런 순간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최근의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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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부터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역시 평일이고 주말이고 여유롭다 싶은 순간은 거의 없었다.
아이가 둘이 있는,
공백이 있는 경단녀가 일을 시작한 것이었고,
많이 버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일욕심 많은 나이고,
신경쓰고 배려하며 노력해도 부족한 것 투성이인 엄마, 며느리, 아내, 딸 그리고 일하는 여성이라서.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던 주말,
밀린 루틴들을 하던 중
설거지를 하다 주저 앉았다.
꾹꾹 밀어둔 두려움이 고개를 쳐들었다.
안돼. 그러면 정말 안돼.
감당할 수 없어. 제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텐데, 뭐지? 뭘까?
그 동안 생각을 안할 수 없었던 물음들이 막을 수 없는 화살이 되어 와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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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아프시다. 많이.
10시간이 넘는 큰 수술을 하신 지 딱 4개월이 됐다.
눈까지 심하게 온 황달, 갈색 소변을 확인하고
곡절 끝에 코로나 19 시기에도 빨리 많은 검사들 끝에 수술을 했고,
정말 감사하게도 말기에나 발견된다는 담낭 쪽 암 1기 진단을 받고 항암없이 회복 중이셨다.
추석이 있던 주말부터 고열이 나고
가까이 다니던 병원도 가봤지만 원인은 찾을 수가 없었고,
고민하다 결국 약국 해열제로도 열이 안잡히던 일주일이 지나 수술했던 병원 응급실로 가셨다.
그렇게 입원하신지 보름째다.
몇 번의 검사를 하셨는지 모르겠다.
하루 네 번 피를 뽑고, 공복 상태로 해야하는 검사를
심지어 생신이셨던 날에도 몇 번이 있어 엄마 속이 까맣게 탔다.
그리 했는데도 원인을 못찾고 있다.
염증수치가 일반인의 30배 수준인 걸 찾았지만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항생제를 강하게 써서 염증수치는 좀 내려갔지만 그마저도 일반인의 10배 수준이다.
해열제도 써볼 수 있는 마지막 단계를 쓰고 있고, 고열이 계속 되고, 수술한 소화기관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상태라 식사도 거의 하지 못하신다.
코로나 19로 병원 방역이 수술하셨을 때보다 더 강화되어,
수술하실 때 병원 안에서 대기할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할 정도로
이제는 엄마를 만나는 것 조차 병원 건물 밖에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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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고 싶지 않은 일도 경험이 되어 교훈을 남긴다.
나의 두려움은 몇 년전 그 날부터 쭉 같았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동생을 잃은 지 내년이면 5주기가 된다.
나의 두려움은 다시 또 가족을 잃을까에 머문다.
동생이 가고 엄마는 뼛국물마저 빠져 버린 것 같았다.
이 시기의 병원은 간병인도 지정된 1명 외에는 출입할 수가 없다.
내가 자도 불편한 간이침상에 수시로 잠깨서 돌봐야 하는 간병일을 엄마에게만 맡겨둔 것이...
악으로 버티는 것 같은 엄마도 휘청일 때가 많은데...
그렇게 버티고 있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영미야, 내일 아침 일찍 주한이한테 가서 얘기 좀 하고 와.
아빠 열 좀 내리게 해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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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나라 병원 가운데 최고라는 곳에서 일하시는 선배님을 뵈었다.
큰 일을 겪을 때마다 제가 병원 쪽에서라도 일했으면 덜했을까?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지 않았을까? 한다고.
대답은 아니라셨다.
본인의 아버지도 응급한 상황으로 속해있는 응급실로 실려 오셨는데
베드(bed)가 없다는 이유로 치료받지 못하시고 동네 병원에서 사흘만에 하늘로 가셨다고.
병원생활 20년이 넘은 본인이 이런 상황이라면
일반인들은 더 할 거라고.
뭔가를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물음이 찾아오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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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저리 말씀하시면 도리가 없다.
주말 출근한다는 남편보내고,
다시 어머님 손을 빌려 애들 맡기고 다녀와야지.
그래봐야 집에서 10분 걸리는 거리니까.
마음을 강하게 먹는다는 것이
평온하게 유지한다는 것이 어렵다.
불면이라도 멈춰야 한다.
기도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그리고 표현해야지.
사랑해요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