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긴 머리를 좋아한다.

내가 한 짓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견뎌내야 한다.

by 플로라

나는 긴 머리를 좋아한다. 로망이라고 할까.

길이감은 가슴선보다 밑으로 내려오는 길이를 해보고 싶은데 한 번도 해볼 수 없었다. 단발병이 주기적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여자의 마음이란 예측하기 힘든 여름날의 날씨 같은 것이다.

작년 여름 어느 날 유난히 숱이 많은 긴 머리카락을 감고 말리다가 팔이 아파서 현타가 좀 왔더랬다. 젖은 머리카락들은 무겁게 느껴졌다. 두피는 숨 좀 쉬고 싶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니 내가 어찌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자기 방어를 해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여름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나의 기억에 망각의 가루를 솔솔 뿌려댔다고.
그 가루는 24시간도 채 안되어서 설탕처럼 녹아 사라지고, 혈당 스파이크 뒤의 그것처럼 후회만 남겼다.

거지존이라고 하는 위기가 찾아오면 매일 같이 거울 속에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자아 둘이 엄청 싸워댄다. 아침마다 묶이지 않는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힘껏 묶어보지만 두피만 아프고 머리카락들은 힘없이 옆으로 흘러내린다. 좌절.

새로 감고 스타일링을 하기에 나의 아침은 바쁘기에 어떻게든 묶어 보려고 애를 쓴다. 일찍 일어난다는 선택지는 없다. 이미 힘들다. 답정너.
안다. 답답하다는 것. 나도 나에게 묻고 싶다. 왜 그랬니?

그래도 지금까지는 머리카락을 지키려는 쪽이 이겨서 간신히 어깨까지 오는 중단발 기장이다. 엄청난 인내심으로 도달한 길이이다.
분명히 단발이 안 어울리고(잘랐을 때 주변 반응이 왜 그랬니였다)! 불편하고! 아침마다 뒤집어지는 머리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걸 알면서(심지어 뒤통수도 눌려있다)! 대체 나는 왜 그럴까 싶다. 물론 첫날은 좋다. 첫날은 말이지. 항상 만족했더랬지. SNS를 그만둬야 하나보다. 나는 그녀들이 아닌데.

참 삶도 머리카락을 기르는 과정과 비슷하다. 아닌 걸 알고 후회할 걸 알면서 같은 짓을 반복한다. 이번에는 아닐 거라고 믿고, 하고 나서 역시나 싶을 때가 많다. 그래서 원하는 결과가 될 때까지 다시 인고의 시간을 거친다. 중간에 포기한다면 도르마무가 되겠지.

물론 헤어피스를 붙이거나 붙임머리 시술을 해서 한 번에 긴 머리카락을 가질 수 있지만, 그건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만큼의 무게도 견뎌내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소유하려면 억지로 가져온 만큼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그렇게 놓아주는 법도 배운다.

머리카락이 묶이지 않는 길이에서 매일 아침 언제 이걸 묶어서 뒤집어진 끝이 티가 안 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자르지 않았으면 됐는데!), 간신히 묶이는 기장이 되면 영혼까지 끌어모아 묶느라 두피가 한동안 고생을 하고. 거지존이라는 고비가 오면 번뇌에 시달린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어쨌든 새삼 많이 길어진 머리카락을 보며 내가 버텨 온 시간이 생각나고, 이게 뭐라고 인생을 운운하게 됐는지 조금 웃음이 난다. 심지어 잊어버리기 전에 쓰겠다고 머리카락을 다 말리지도 못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내가 한 짓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견뎌내야 한다. 이번 생에 한 번쯤은 가슴선까지 머리를 길러보고 싶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