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쥬라기 정원에서 온 초대장

by mini

플로리스트의 시계는 세상의 속도보다 늘 한 계절을 앞서 흐릅니다. 남들이 두툼한 외투 깃을 여미며 여전히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을 때, 저는 꽃시장에서 데려온 몽글몽글한 목련 가지를 보며 이미 사월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며칠 전, 붓끝처럼 단단하게 닫혀 있던 목련 봉오리들이 이틀 밤을 넘기더니 툭, 툭 소리를 내며 꽃잎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성급하고도 반가운 개화 앞에서 저는 태안 천리포수목원을 떠올립니다. 4월이면 그곳에선 목련 숲 사이로 찰리푸스모건이라는 이름의 공룡이 관람객을 맞아준다고 합니다. (찰리 푸스 모건은 '천리포수목원'을 잘못 들어 만들어진 공룡의 이름입니다)


단순히 아이들을 위한 이벤트인 줄 알았더니, 그 속엔 근사한 고증이 숨어 있었습니다. 목련은 공룡이 지구를 호령하던 백악기 시절부터 피어있던, 그야말로 ‘살아있는 화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목련은 나비나 벌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꿀로 곤충을 유혹하는 대신, 딱정벌레가 꽃잎을 갉아먹으며 수정을 돕도록 진화했지요. 딱정벌레의 억센 턱으로부터 암술과 수술을 보호하기 위해 꽃잎이 가죽처럼 두껍고 단단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우아하다고만 생각했던 그 도톰한 꽃잎이 실은 거친 시대를 견뎌내기 위한 방어기제였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게 다가옵니다.


4월의 수목원까지 기다릴 인내심이 제게는 없습니다. 저는 거실 TV 앞에 갓 피어난 목련 화병을 가져다 놓습니다. 화면 속에는 웅장한 음악과 함께 공룡들이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고, 제 눈앞에는 그 시절부터 존재했던 목련의 우아한 곡선이 겹쳐집니다. 21세기의 거실이 순식간에 1억 년 전의 ‘쥬라기 정원’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입니다.

입안에서는 목련 꽃잎을 꼭 닮은 알새우칩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집니다. 기름진 고소함과 바삭한 식감이 입안에 퍼질 때마다, 왠지 목련의 그 두툼한 꽃잎도 이토록 생명력 넘치는 소리를 내며 피어났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꽃잎 한 장에 담긴 9,500만 년의 시간과 과자 한 조각의 가벼운 즐거움이 묘하게 어우러집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저의 봄은 이토록 다층적입니다. 플로리스트의 손끝에서 시작된 계절이 고대 생태학의 신비로 이어지고, 다시 과자 봉지의 바스락 거림으로 내려앉는 이 평화로운 사치.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제 방 안의 목련 한 송이가 이미 저를 가장 먼 과거이자, 가장 찬란한 봄으로 데려다주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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