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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유 Sep 18. 2024

강릉살이 5개월 차의  첫 추석

지루할 만큼 평온한 추석날


나에게 추석이란 단어는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싫고 스트레스를 주는 단어였다.

27년 결혼시간 동안 외며느리로서 음식준비를 혼자 도맡아서 했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는 조금씩 도와주기는 했지만

장보기부터 시작해서 하루종일 명절음식 5~6가지를 하는 게 허리디스크가 있는 나로서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오죽하면 명절 1주일 전부터 명절스트레스증후군 때문에 가슴이 벌렁거리고 불안했을까?

하물며 시댁으로 가려고 운전하다가 교통사고가 난 적도 있다.


요즘 며느리들은 우리 시대만큼 명절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 듯하다.

우리 큰딸은 2박 3일 가족과 여행을 갔다고 하고 둘째 딸은 시어머니가 모든 음식을 다 해주셔서 아기를 데리고 가서 먹기만 한다.


아마도 우리 세대가 며느리들이 힘들었던 마지막 세대인 것 같다.

요즘 며느리들은 음식을 해갈 때도 사가는 건 물론이고 밀키트 몇 개를 합쳐서 해간다는 얘기도 들었다.

참 좋은 시대다. 아무래도 대부분 맞벌이를 하는 시대이니 더 그렇겠지..




강릉으로 이사 오고 첫 추석이었다.

서울에 가지 않고 지난주에 시댁식구들이 강릉여행을 오셨었다. 그래서 이번 추석엔 강릉에 있기로 했다.


서울에 살 때는 명절 때 도로가 한산해서

" 평소에도 이 정도로 안 막히면 좋겠다" 란 말을 많이 했었는데 강릉은 반대였다.

연휴에 강릉으로 여행 온 차들로 거리가 평소보다 2배는 막히는 거다.


그리고 서울의 음식점들과는 달리 강릉의 음식점들은 대목이기 때문에 추석 당일도 쉬지 않고 영업을 한다.

이번 추석에도 수많은 여행객들이 강릉 맛집을 방문해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을 것이다.



강릉은 음식도 맛있지만 빵과 커피가 유명하다.

빵과 커피의 수준이 웬만한 서울 빵집과 카페는 명함도 못내 밀정도다.


카페나 빵집 오픈런은 흔한 일이니까...

툇마루 카페의 흑임자라테가 하도 유명하다기에 먹어 볼 엄두도 못 냈는데 우연히 웨이팅 없이 들어가(주문하고 음료가 나오기까지 1시간은 걸렸으나) 한입 먹어 보니 역시나 맛이 기막혔다.


그냥 커피와 우유와 흑임자와 설탕의 조합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춰진 느낌이었다.

" 와 왜 그렇게 유명한 지 알겠다. 1시간 웨이팅 할 만하네"라고 감탄하게 되는 맛!!


이번 추석에도 얼마나 많은 분들의 미각에 만족감을 주었을지...





이번 추석엔 연휴시작할 때 갈비찜과 전만 미리 만들었다. 정작 추석 당일엔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드라마 보다가, 책 읽다가, 낮잠도 잤다. 그러다가 소파에 널브러져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화창하게 맑은 날이었지만 유난히 뭉게구름이 많은 날이었다.

구름의 미세한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했다. 멈춰있는 것 같았으나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이 없으니 이 움직임은  지구의 공전 때문일까? 란 생각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는 저 구름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심심할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름의 색깔이 변하는 것이 보이더라. 그런 하늘을 카메라에 담아두었다.


느리게 흘러가는 하루를 즐길 마음의 여유가 생겼나 보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추석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하니 하늘을 관찰하고 있는 내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지루할 만큼 평온한 추석이라니..

삶이 아름다운 건 이런 다채로움이 있기 때문이겠지.


강릉에서의 첫 추석은 어느 때보다 하늘을 많이 본 날로 기억될 것이다.

강릉은 멈춤, 여유, 느림이 가능한 도시다.

그런 강릉의 매력에 점점 더 빠져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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