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여행
“내가 일주일 동안 일찍 퇴근해서 애 볼 테니까 당신 혼자 다녀와!”
오랜만에 유럽 여행을 꿈꾸는 아내에게 진정한 휴식 시간을 선물해주겠다는 남편의 배려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간만의 휴가에 사춘기 딸내미랑 싸우지 말고 혼자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라는 남편의 조언이었다. 남편 말처럼 같이 여행 가면 24시간 붙어지내며 시시때때로 싸울게 뻔했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서로를 향해 쏟아붓는 모녀의 언쟁이 벌어지는 날이면 남편은 다시 회사로 가버리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단 1분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은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니, 모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삐죽삐죽 모난 말이 날아다니는 집안 분위기는 총칼 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홀로 유럽 테라스 카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하며 커피 한잔 하는 모습, 오르셰 뮤지엄을 천천히 둘러보며 고흐와 르누아르 그림에 집중하는 장면을 떠올려봤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로컬 마트에 들러 와인 한 병과 묵직한 치즈 한 덩이, 기다란 바게트 빵을 사들고 오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분위기 있는 골드미스 코스프레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엄마는 또 다른 장면을 연달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었다. 아이한테 유럽의 역사적인 명소를 구경시켜주는 시간, 프랑스 미식 문화를 함께 즐기는 순간,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자연환경을 느낄 수 있는 알프스나 지중해 지역을 거닐며 대자연의 신비로움에 빠지는 경험, 하나하나 떠올릴수록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가 서로를 미워해서 싸우는 건 아니잖아? 날마다 싸워도 매일 서로 좋다고 끌어안고 애정 표현을 하는 엄마와 딸인걸. 게다가 유럽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해지면, 우리 모녀 사이도 그 분위기에 녹아들어 녹진한 치즈처럼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아이를 급하게 불러서 물어봤다.
“엄마랑 같이 유럽으로 여행 갈래?”
“아니.”
따뜻하게 데워지고 있는 엄마 마음에 찬물을 확 끼얹듯, 돌아오는 아이의 대답은 단호했다.
“왜? 너 중학교 가면 장기 여행 가기 힘들어질 텐데, 그전에 유럽 가보고 싶지 않아?”
“아니, 난 유럽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 나는 수영할 수 있는 데로 놀러 가는 게 좋아.”
“그럼 엄마 혼자 여행 다녀올 동안 아빠랑 지낼래?”
“그건 더 싫어. 나는 밤에 엄마 없으면 못 잔단 말이야.”
딸아이는 나와 취향이 참 다르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있으라고 해도 몇 시간은 거뜬히 엉덩이 붙이고 눌러앉아있는 타입이다. 나이가 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정적인 활동을 좋아했다. 반면에 아이는 신나게 몸을 움직이며 에너지를 발산하고 난 뒤에야 학습에 집중할 수 있는 편이다. 관광지를 둘러보며 문화 예술을 감상하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엄마와 다르게, 액티비티 활동을 하며 하루 종일 온몸으로 짜릿함을 느끼는 게 여행이라고 하는 딸이다. 그동안은 주로 아이 성향에 맞춰 여행지를 선택했지만 이번에는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내가 원하는 여행지에 가면서 그곳에서 아이의 취향도 만족시킬 수 있는 절충안을 찾고 싶었다.
유럽 지도를 펼치고 나와 아이의 취향을 모두 반영할 수 있는 여행지를 찾아봤다. 파리 디즈니랜드와 남프랑스 지중해 바다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파리와 니스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에 가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가 원하는 놀이공원에 들를 수 있고 바다에서 수영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완벽한 여행지를 찾았다는 생각에 신나서 다시 아이를 불러 나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당연히 아이가 뛸뜻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이는 열흘 동안 친구들과 놀 수 없다는 게 못마땅하지만, 여러 날동안 엄마 냄새를 맡지 못한 채 잠드는 게 싫어서 마지못해 엄마 따라 프랑스에 가겠다고 했다. 나라면 좋은 구경시켜주려고 고민하는 엄마가 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동상이몽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싶어서 씁쓸했다. 막상 가서 유럽 땅을 밟아보면 아이도 생각이 달라지겠거니 기대하며 여행길에 나섰다.
역시나 파리는 나이를 막론하고 여심 저격하는 곳이었다. 고풍스러운 거리를 보는 순간, 아이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따라오길 잘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낯선 도시에서 아이가 의지할 곳이 엄마뿐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고분고분하게 말도 잘 들었다. 물론 둘 사이의 사소한 투닥거림은 종종 있었다. 소매치기 조심해야 하니 가방 지퍼 닫으라던가, 일교차가 크니까 번거롭더라도 카디건은 꼭 챙겨 들고나가라는 엄마의 조언이 아이한테는 성가신 잔소리로 들렸을 테다. 아끼는 마음에 해주는 말에 상냥한 답변 대신 찌푸린 표정을 보낼 때면 기분이 확 상했다. 내가 여행 와서까지 딸과 사소한 일로 부대껴야 하나 싶은 순간들이었다. 아마 남이었으면 각자 스타일대로 여행하자며 갈라섰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돌아서면 언제 싸웠냐는 듯 손 꼭 붙잡고 걷는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열흘간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여행 메이트가 될 수 있었다.
딸과 나의 MBTI 성격 유형은 정반대다. 총 16가지 유형 지표 중에서 경우에 따라서 선호 지표가 하나 이상이 겹칠 수 있다. 하지만 나와 아이의 성격 유형 테스트 결과는 단 하나의 지표도 겹치지 않는다.
ISTJ 엄마 vs ENFP 딸
I (내향성) - E (외향성)
S (감각형) - N (직관형)
T (사고형) - F (감정형)
J (판단형) - P (인식형)
체계적으로 일을 계획하는 나는 우리 둘의 취향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여행 동선을 짰다. 사전에 구글 맵에서 우리가 방문할 예정 요일과 시간대를 설정한 뒤 최적의 경로 탐색을 하고 예상 경유시간까지 고려했다.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플랜 B를 마련해두는 일도 잊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상황이 발생해도 최대한 신중하게 대처하는 차분한 성격이라서 먼 이국땅에 딸과 아내만 여행 보내도 남편이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며 농담하기도 했다.
반면에 나는 어떤 일을 경험하면서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의 만족감을 얻지는 못하는 편이다. 내가 계획한 대로 실행하고, 딱 기대치만큼 기쁨을 누리게 된다. 즉흥적이고 새로운 도전에 과감한 딸은 나와 다르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즐거움을 느끼곤 한다. 예를 들면, 나는 프랑스 현지 마트에서 사전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추천 과자를 구매하는 반면에 아이는 그 순간 자신이 끌리는 대로 과자를 선택했다. 당연히 여러 사람이 추천해준 과자는 맛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집어 든 과자 역시 맛이 좋았다. 나 혼자라면 한 가지 맛만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딸 덕분에 맛있는 과자를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었다.
남프랑스에서 베흐동 협곡을 구경하기 위해 일일투어에 참여한 날이었다. 하루 종일 작은 승합차 안에서 함께 여행할 텐데 이왕이면 다른 일행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게 훨씬 즐거운 여행길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내성적인 엄마는 처음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트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낯선 사람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금방 만들어주는 건 외향적인 우리 딸 담당이다. 가이드까지 포함해서 총 6명의 일행 중 유일한 어린이였지만, 중간중간 어른들을 빵 터지게 만드는 재치 있는 이야기로 아이는 차 안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다 달았다. 유럽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불린다는 프랑스 베흐동 협곡을 구경하며 구비구비 산고개를 넘었다. 알프스 끝자락이 만들어내는 아찔한 협곡을 지나고 나니 생트크화 호수의 에메랄드빛 물이 햇빛에 반짝였다. 엽서 같은 풍경 속에서 아이와 단둘이 패들보트를 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냥 신났다. 강렬한 햇빛에 팔뚝이 빨갛게 달아오르는지도 모르고 아이와 둘이 신나게 발을 구르며 페달을 밟았다. 양 옆에 병풍처럼 펼쳐진 협곡 사이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호수를 즐기는 현지인과 여행객들이 있었다. 강아지와 함께 보트에 몸을 실은 사람, 흥겹게 단체로 노래를 부르며 배를 타는 사람들, 절벽에 올라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아이와 나는 번갈아가면서 뱃머리에 앉아 옥빛 호숫물에 발을 담갔다. 시원한 물이 발끝에 닿으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엄마, 나 수영할래!”
“뭐? 수영복 안 챙겨 왔잖아. 수건도 없고, 갈아입을 옷도 없잖아.”
“괜찮아, 나 옷 젖어도 돼.”
“우리 배 타고난 이후에도 아직 여행 일정이 반나절이나 남아있어. 젖은 옷으로 차량 탑승할 수는 없잖아. 우리 차도 아닌데….”
“그럼 겉옷은 벗어둘게.”
아이는 티셔츠와 반바지를 보트 위에 벗어두고 호수로 풍덩 몸을 던졌다. 입을 하 벌리고 행복해하던 아이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금껏 여러 곳에서 수영해봤지만 생트크화 호수에서 수영했던 시간이 아이한테는 최고였다고 한다. 바닷물에서는 파도에 몸이 휩쓸려 무서울 때도 있고, 수영하고 나온 뒤 몸에 짠기가 남아 찝찝할 때가 있었다고 한다. 잔잔한 호수에서는 내 의지대로 마음껏 수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호수 물은 수영한 뒤에도 아주 깔끔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고 한다. 게다가 파란 하늘 아래 대자연이 만들어낸 천연 수영장에서 물놀이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하랴. 단연 최고의 순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컷 수영하고 보트 위로 올라온 아이는 나한테 카디건을 빌려 물기를 쓱쓱 닦았다. 선착장까지 돌아가는 보트 위에서 뜨거운 태양에 젖은 속옷을 잠시 말렸다. 프랑스에 온 순간부터 아이의 혈관에는 프랑스인의 자유분방함이 흐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젖은 속옷을 입고 불편하지는 않을까 걱정할 틈도 없이 순간을 즐길 주 아는 낭만과 용기가 그저 부러웠다. 나라면 절대 시도하지 못했을 일을 아이가 대신하는 걸 곁에서 보면서 대리 만족할 수 있었다. 나 대신 평생 잊지 못할 인상적인 추억을 만들어주는 아이한테 고마웠다.
난 여전히 궁금하다. 옥색 빛깔 호수에서 수영하는 그 느낌이 얼마나 상쾌하고 개운한지…. 다음번에 같은 장소를 다시 찾는다면, 그때는 나도 아이처럼 즉흥적으로 호수에 뛰어들 수 있을까? 아마도 다시 태어나야 가능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