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토는 총장실의 정식 출입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출입문 반대편에 있는 그림 앞으로 갔다. 모루스 해에 있다는 모루스 나무를 그린 그림은 가로와 세로가 사람 키의 반만 한 크기였다. 리마토가 그림 뒤로 손을 넣었다.
달칵 하는 소리를 들으며 시스는 그림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리마토가 그림의 아래쪽 틀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림 즉 문이 들창처럼 열렸다. 시스는 촛불이 타는 촛대를 들고 왔다. 리마토가 시스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무릎보다 한 뼘은 더 높은 턱을 시스는 촛대를 들고도 가볍게 넘었다. 리마토가 곧 그녀를 따라 어두운 통로로 들어섰다. 겨우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만한 크기의 통로 바닥은 아래로 경사져 있었다.
“비밀 통로가 있었다니……. 설마 지하 석실까지 곧장 갈 수 있는 건가요?”
시스는 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소곤소곤 물었다.
“남들 눈을 피해 몰래 들어가야 하는 주제에 별관으로 통하는 돌다리를 지날 수는 없잖느냐. 그리고 아쉽게도 석실이나 지하 수장고로 곧바로 통하는 건 아니다.”
리마토도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닥속닥 대답했다.
“절 죽어가게 만든 흑주술 말이에요. 살아 있는 인형, 이라는 거였어요. 주술을 건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거나 말하거나 할 수 있었어요.”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나는 끔찍한 경험이었다. 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살아 있는 인형.”
뭔가 생각하는 눈빛으로 리마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듣는 일이 아니신 거죠? 그런 사례가 또 있었던 거죠?”
리마토는 답해 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바로 헛웃음을 웃었다. 그 표정이 곧 답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넌 어떻게 그 흑주술에서 풀려났느냐?”
“신비롭고 선한 존재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어요.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예요. 그리고 완전히 풀려났다고도 할 수 없죠. 아시다시피 전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신비롭고 선한 존재?”
생각에 잠긴 얼굴로 리마토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강요해 본들 소용없을 터였다.
설마하니 이 아이가 풀게트 관문을 넘어갔었다는 건가? 번개 반도가 실재하는 땅이라는 건가? 이쪽 땅에서는 자취를 감춰 버린 도채비족이 정말 거기에 있다는 건가? 리마토가 알기로 그 사악한 흑주술은 인간의 능력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로는 아래로 내려가다 수평으로 이어지고 다시 오르막으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막다른 곳에 이르자 리마토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벽에 난 틈새에 밀어 넣고 벽을 밀었다. 비밀 통로로 들어올 때와 같은 원리로 그림 액자로 된 들창이 열렸다.
시스는 촛대를 한쪽에 내려놓고 미리부터 지니고 온 야광석을 꺼냈다. 비어 있는 박물관에서 촛불을 들고 움직였다가 그 불빛을 누군가가 보기라도 하면 곤란할 테니까.
“아아, 여기구나.”
시스가 리마토를 따라 나온 곳은 지하 수장고로 내려가는 계단에 있는 계단참이었다. 그녀는 그림에 야광석을 가까이 비춰 보았다. 티토니아의 서쪽 바다에 있다는 레메디움을 그린 것이었다. 잎이 붉고 꽃이 푸르다는 전설의 나무였다.
“모루스와 레메디움이 이어져 있었다니. 동쪽과 서쪽을 상징하는, 짝을 이루는 나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건 예상을 못했네요. 예, 예, 알아요. 저는 이 통로를 지나온 적도 없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이 통로를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요.”
“암, 그래야지. 내려가자.”
두 사람은 야광석의 미약한 빛에 의지한 채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내려갔다. 리마토가 열쇠로 수장고를 열었다. 넓은 수장고를 단번에 가로질러 석실 앞에 서자 리마토가 시스를 돌아보았다.
“잠시 돌아서 있거라.”
시스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따라서 리마토가 어떤 식으로 석실 문을 여는지 볼 수 없었다. 시스가 알아챌 수 있었던 건 열쇠만이 아니라 다른 장치가 더해져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들어오너라.”
부름을 받은 시스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돌아섰다. 석실에는 군데군데 수많은 촛불이 밝혀져 있어 제법 환했다.
“석실은 천연 동굴이었군요.”
작은 목소리가 울려서 증폭되었다.
“지하 수장고를 만들던 중에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내부는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돌조각들을 여기 저기 모아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보존했다고 하는데 내 눈으로 본 건 아니니 그 기록에 대한 진위는 알아낼 길이 없고.”
“촛불을 제외하고는 다 그대로라는 거죠?”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렇지.”
시스는 먼저 내부를 전체적으로 한 번 둘러보았다. 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동굴 벽면 곳곳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흔적들과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돌조각들이 다였다.
“가장 오래된 유물은 저 그림들 가운데 하나인 걸까요?”
“그걸 모르겠구나. 저 흔적이 그림의 흔적인지 문자의 흔적인지. 저 흔적들만이 유물인지 저 돌멩이들도 유물이라고 해야 할지.”
이미 수도 없이 동굴을 살펴본 바 있는 리마토가 한쪽 귀퉁이의 의자처럼 튀어나온 부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마음껏 살펴보렴. 가장 오래된 유물이 뭔지 알겠으면 나에게도 알려주고.”
리마토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시스는 촛불 하나를 들어 동굴의 벽을 꼼꼼히 비추면서 유심히 관찰했다. 천연 동굴인 만큼 벽면에는 요철이 있었고, 주로 선들로 이루어진 흔적은 흐릿하고 지워진 데도 많았다. 애초에 제대로 된 형체가 있기나 한 건지, 도무지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저긴 처음부터 저렇게 무너져 있었다는 거죠?”
시스는 바위와 크고 작은 돌들과 흙으로 막힌 쪽을 가리켰다.
“맞다. 아마 누군가가 이 동굴에 드나들던 그 옛날 옛적에는 그쪽이 입구가 아니었나 싶다.”
쌓인 흙을 손으로 쓸어 보던 시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급한 걸음으로 리마토 쪽으로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