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을 것 같네요. 하지만 중요한 건 무너졌다는 거예요. 입구가 저렇게 무너질 정도의 충격이 있었다면 동굴 내부도 흔들렸겠죠? 그리고 긴긴 세월의 영향도 있었을 거예요. 저것들 말이에요.”
동굴 가장자리 이곳저곳에 있는 돌조각의 무더기를 가리키면서 시스는 스스로를 향해 끄덕였다. 확신에 찬 끄덕임이었다. 이어 그녀는 돌조각 몇 개를 들어 요리조리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러다 그 중 하나를 들고 벽으로 다가가서는 희미한 흔적이 끊긴 자리에 댔다.
“들어맞는군!”
펄쩍 뛰듯이 일어난 리마토가 놀라운 속도로 달려왔다. 그의 늙은 다리가 이토록 빠르게 움직인 것은 적게 잡아도 몇십 년 만일 것이다.
“떨어져 나온 부분을 하나하나 맞춰 봐야겠어요.”
시스가 손을 뗐는데도 돌조각은 그대로 있었다.
“같이 해보자꾸나.”
엄청난 발견이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노인에게 기운을 불어 넣었다. 리마토는 얼른 돌조각을 뒤져서 무늬인지 표식인지가 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러고는 제자리를 찾기 위해 왔다갔다 분주히 노력했다. 그러다 마침내 맞는 자리를 찾았지만.
“허어, 이거……. 흠…… 그런 것인가?”
몇 번이나 애를 써 보던 그는 돌조각을 들고 물러섰다. 시스가 한 것과 달리 그가 맞춰 넣은 돌조각은 무슨 수를 써도 자꾸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리마토는 이 동굴이, 유적이 사람을 가리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하튼 이 일은 시스에게만 허락된 거구나, 하고.
“시스, 얘야.”
한창 돌조각을 고르는 데 열중해 있던 시스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일을 나누는 게 맞겠다. 이걸 봐라.”
리마토는 돌조각을 동굴 벽면에 얹고 조심스레 손을 뗐다. 돌은 툭 떨어져 버렸다. 리마토가 한 번 더 그렇게 해 보이자 시스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럼 흔적 있는 돌조각을 찾아내서 따로 모아 주세요. 벽에 맞춰서 넣는 건 제가 할게요.”
돌들이 자그락대는 소리와 시스의 발소리만이 낮은 울림을 만들어 내며 동굴로 된 석실 안을 떠다녔다. 그런 시간이 제법 흘러갔을 무렵 벽면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물이었다. 수면에 이는 물결이 벽에 그득했다. 수많은 촛불의 떨림 때문인지 마치 물결이 흔들리는 듯한 착시가 일었다. 석실 자체가 거대한 연못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찰랑찰랑 물이 흔들리는 소리마저 귓전을 스치는 듯했다.
물 위로 윤곽이 불분명한 새하얀 얼굴과 붉은 눈이 떠 있었다. 그 눈에서 흘렸을 듯한 붉은 눈물방울이 수면에서 부서졌다.
물에서 물빛의 두 손이 나와 그 얼굴을 향해 뻗어 있었다. 손은 마찬가지로 물빛인 무언가를 받쳐 들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시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콤메르의 말을 떠올렸다. ‘심장을 빌린 자’. 그러니까 저 손에 들린 것이 심장이리라.
그런데 둘 중 누가 ‘빌린 자’인 거지? 이 그림이, 심장을 빌린 자가, 어떻게 내 목숨을 구할 단서가 된다는 거지? 그림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나에게도 심장을 빌려 줄 게 아니라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답을 찾아 헤매는 간절함으로 시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은 그림의 손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림 속 심장이 손에 닿는 순간 시스의 귀에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는 천공의 언덕에서 태어난 자. 신비의 영약을 몸에 지닌 자. 다만 스스로를 구하지 못하는 자. 그리하여 심장을 빚진 자. 지기를 잃은 자. 너의 심장을 돌려줄 날을 위해 나 그곳으로 돌아가노라. 반드시 내가 너의 심장을 되살려 붉은 꽃으로 피우리라.’
슬픔이, 해일 같은 슬픔이 사무치게 밀려드는 목소리가 거듭거듭 메아리쳤다. 시스는 그 슬픔에 동화되어 숨조차 쉬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먹먹해졌다.
“시스, 시스. 괜찮은 게냐?”
불안해진 리마토가 다급하게 시스를 불렀다. 그녀가 듣는 소리를 그는 듣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 살아 움직이는 그림도 리마토에게는 그저 오래되고 희미한 동굴 벽화일 뿐이었다.
리마토가 보기에 시스는 그림에 손을 겹친 채 넋이 나가 버린 상태였다. 그녀는 동공이 텅 비고, 얼굴이 투명하리만치 창백해지고, 너무 오래다 싶게 숨을 멈춘 채였다. 마치 벽과 함께 굳어 버린 것처럼.
“시스. 정신 차려라, 얘야.”
아무리 부르고 흔들어도 소용없었다. 어찌해야 좋을까. 다급한 궁리를 하던 리마토가 벽면에 맞춰 넣은 돌조각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손이 닿지 않은 돌들까지 와르르 떨어져 내리면서 시스도 벽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으냐?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다.”
리마토는 시스를 부축했다.
시스는 나가기 직전에 석실 안을 돌아보았다. 제자리를 찾아 주었던 돌조각들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고 벽화는 다시 알아볼 수 없는 흔적으로 돌아갔다. 부옇게 인 먼지가 촛불의 빛 속에 어렴풋이 반짝였다.
두 사람은 지하 수장고를 나와 다시 비밀 통로를 지났다. 총장실로 돌아온 리마토는 시스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는 출입문을 열어 인티무스를 불러 들였다.
“네가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여태 있었구나. 어쩌다 보니 얘기가 너무 길어져서 말이다.”
리마토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시스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도 되겠지요?”
인티무스의 얼굴이 근심과 초조로 그늘져 있었다.
“그럴 수는 없지. 시스는 최초 신전의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니까. 보고를 올린 오티움에서 데리고 있어야 해. 안타깝지만 시스는 못 데려간다.”
“애초에 시스는 제 집에 온 손님이고, 모임에 데려온 것도 접니다. 제가 책임지고 잘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데려가게 해주십시오. 정 뭣하시면 총장님의 사람을 저희에게 붙여 놓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오티움에서 데리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생각이 많아 보이는 시스를 곁눈질하며 인티무스가 간청했다.
“총장님 말씀대로 하는 게 좋겠어, 인티무스. 난 괜찮으니까 넌 이만 돌아가. 길고 지치는 밤이었을 텐데, 가서 푹 자. 내가 걱정되면 내일 또 만나러 오면 되잖아. 그래도 되는 거죠?”
시스가 리마토를 보았다.
“당연히 되지. 시스가 죄수도 아닌데.”
농담을 섞은 리마토의 대답에 시스는 웃었지만 인티무스는 웃지 않았다.
“알았어. 내일 다시 올게.”
인티무스는 착잡하게 말하고 무거운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